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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지하다 Apr 20. 2023

인생에도 난이도 선택이 된다면

어제 북한산에 올랐다. 불광역 근처 북한산 생태공원 동쪽에서 시작해 족두리봉을 오르는 루트로 발을 뗐다.

어쩌다 알게 된 입구가 그곳이라 벌써 두 번째로 이곳을 시작점으로 오른 것이었다.

산에 오르다 다른 등산객분들과 이야기하며 알게 된 사실은, 내가 진입한 곳은 꽤 어려운 코스라는 것이다.

지겹게 계단만 오르는 등산보다는 바위를 두 손 두 발로 타는 것이 더 재밌던 나는,

오르면서 '꽤 만만치 않은데?' 정도로 생각했지, 일반 등산객에게 어려운 코스로 불리는 곳인 줄은 몰랐다.

내가 그러한 코스로 올라왔다는 것에 일말의 뿌듯함을 느끼며 문수봉을 향해 가는데, 나의 상식이 통하지 않는 표지판이 나타났다.


목적지는 같은 문수봉, 쉬움과 어려움 중에 선택하라는데, 보통 난이도 하는 쉬운 대신 더 오래 걸리고, 어려운 길은 주로 지름길이라 더 짧아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데 둘 다 0.4km라니... 왓츠딧스?

어려운 길의 거리가 더 짧았다면, 시간 대비 효율을 들며 쉽사리 어려운 길을 선택했을 테지만 목적지는 같고, 거리도 같다. 그래서 5초 정도 망설였다. 그리고 나는 '어려움'을 선택했다. 이유는? 그냥 더 재밌을 것 같아서? 나에게 마조히스트의 성향이 있었던가...


와... 그런데 '어려움'의 정도가 이 정도인지 몰랐다. 나는 어느 순간 내가 등산을 하고 있는 것인지 서커스를 하고 있는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한 마리의 원숭이가 되어야 했다. 급경사의 암벽이었고 잡지 않고서는 오르는 것이 불가능한 옆의 철기둥에서 손이 미끄러지기라도 한다면, 상상도 하고 싶지 않은 일이 벌어질 테였다. 게다가 왼쪽에 있던 철기둥이 사라지고 오른쪽 철기둥으로 갈아타 잡아야 하는 순간은 정말 아찔할 정도였다. 와, 이런 줄 알았다면 과연 내가 '쉬움' 대신 '어려움'을 선택했을까?


한국 산 초보에게는 이미 등정했던 네팔의 안나프루나보다 어렵게 느껴지던 문수봉 가는 '어려운 길'


같은 목적지에 오르는 등산길의 난이도를 선택하면서, 과연 인생도 이렇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분명 같은 목적지에 도달할 것을 알고, 걸리는 거리(시간)도 같다면. 나는 난이도 '쉬움'을 선택할까 '어려움'을 선택할까?? '쉬움'을 선택하는 것이 합리적이고 현명한 선택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마 또 '어려움'을 선택할 것 같다. 왜? 누구나 다 가는 쉬운 길은 재미없잖아~(역시 난 마조히스트인가? 분명 그런 쪽은 아닌데...)  재미없는 인생은 싫다. 무엇보다 쉬운 길이 정해진 계단을 터벅터벅 오르는 것이라면, 어려운 길은 어느 곳에 발을 디딜지 내가 정할 수 있다. 어떤 움직임으로 오를지, 어디에서 힘을 주고 뺄지 모두 내가 정한다. 물론 그러다 발을 헛디디거나 손이 미끄러져 넘어진다면 어떤 결과가 나오던 그것마저 내 책임이다. 한 발 한 손의 움직임이 모두 오롯한 나의 책임이기 때문에 더 신중하고 공들여 오른다. 그리고 아마 그 사이 나는 조금 더 단단해지겠지,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쉬운 길을 선택했던 사람들과 같은 시간에 목적지에서 만난다 해도 손해 봤다는 느낌은 들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손에 박힌 굳은살을 보며 나에게 박수를 보낼 것이다. 같은 결과를 얻게 된다고 해도, 그 과정을 얼마나 즐겼는지가 나에겐 중요하기 때문에. 막상 합리성을 들며 쉬운 길을 선택했는데 인파가 너무 몰려 짜증이 날 수도 있고, 쉬운 길 쪽에서 낙석이 발생할 수도 있다. 인생은 모름지기 앞을 예측할 수 없으니. 그러니 나는 나의 성향을 받아들이고 어려운 길로 가련다. '왜 굳이 사서 고생, 왜 나는 이렇게 생겨먹었을까...' 자책하지 않겠다.


나는 공부만 했어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을 중3 초부터 고2말까지 3년간 패스트푸드점 아르바이트를 했다. 고3이 되기 직전 학업에 집중하기 위해 알바를 그만뒀지만, 내가 그 3년 동안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고 공부만 했다 하더라도 나는 같은 수능 점수를 받았을 것이다. 목적지는 같았다. 걸리는 시간도 변함없었다. 하지만 그 3년의 아르바이트는 나에게 인생의 근육을 쌓아주었다. 반말하는 손님에게 대처하는 법(영수증을 심하게 구겨서 주었다... 중3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용기였다, 35살인 지금은 나도 같이 반말로 응대한다.), 최대한 빠르고 정확하게 일하는 방법(어려서 그런지 체득이 빨랐다.) 등을 터득했고, 학업과 일을 병행한다고 2년 동안 고등학교에서 '효행상'도 받았다. 부모님 좋으라고 하는 게 아니었는데 어른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뭐,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목적지까지 가는 길에, 난이도는 내가 선택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사실 서커스를 하며 문수봉을 오르면서 힘들었지만 재밌었다. '와, 간만에 온갖 근육을 다 쓰네. 내가 이런 험준한 벽을 탄다니, 대단한 도전이야!' 하면서 나름 즐기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겉에서 보아도 안에서 보아도 잘 단련된 한 마리의 인간이 되고 싶은 나에게 어울리는 길이었다.

쉬운 길을 가려는 사람들에게도 박수를 보낼 것이다. 자신의 성향을 파악하고 맞는 길을 선택한 것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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