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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지하다 May 25. 2023

새벽 세시에 만난 양아치

보이지 않는 손

올해 초부터 자정엔 무조건 잠자리에 들기로 노력을 잘 해왔건만, 발리 휴가를 다녀온 뒤로 모든 것이 틀어졌다.

여전히 자정에 눕기는 하지만, 잠이 안 오니 핸드폰을 보게 되고 핸드폰을 보다 보면 잠이 더 안 오게 되는 현대인의 흔한 악순환이다.


어젯밤도 그런 밤이었다. 새벽 두 시가 넘었지만 유튜브를 보아서 각성된 상태로, 마침내 거칠 것 없는 시계는 새벽 세시를 향해 여유롭게 질주하고 있었다. (한 때 핸드폰으로 모닝콜을 맞추기 싫어서 샀던 알람시계인데, 작은 몸집에 비해 우는 소리가 얼마나 큰 지 옆집에까지 들리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에, 알람이 울리면 벌떡 일어나게 하는 파워를 가진 놈이다. 끄고 다시 잔다는 것은 내 문제지만...)


이제 곧 잠들었다가 눈을 뜨면, 25일 아침이니 오매불망 기다리던 월급이 들어와 있겠네? 생각하며 기쁘게 잠들려던 바로 그 찰나, 문자가 왔다. 무음 속 핸드폰에선 띵동 소리 대신 배너가 내려왔다. 핸드폰을 내려놓고 자기 직전이었는데 이 시간에 문자라?


얼마 전, 지금 막 배송완료했다며 새벽 1시에 와서 나를 깜짝 놀라게 했던 쿠팡의 배송완료 문자를 상기시켰지만, 이번엔 쿠팡을 시킨 것도 없었다. 누굴까? 배너에서 가장 눈에 띄는 단어는 '우리'였다. 이 야심한 새벽 2:49AM에 우리라는 표현을 쓰는 넌 누구지? 떠나간 옛 연인을 그리워하면 보낸 전 남자 친구의 문자라고 생각하기엔 내 구 남친들은 나의 한국번호를 모르지 않는가.

짐작 가는 것은 단 하나. 월급이 빨리 들어왔구나!!! (아무리 그래도 새벽 세시에? 예약송금을 해뒀나?)

'사려 깊기도 하지, 고마운 우리 회사!'라고 생각하며 문자를 열었다.


그리고 무지막지한 실망감과 함께 소름마저 끼쳤다. 속으론 욕이 나왔다.



새벽 3시, 모두가 잠든 이 야심한 시각,

카드값을 빼내려는 우리 자랑스러운 우리 카드.

화가 났다.

이미 자정이 지났기에 25일인 오늘은, 월급날이자 카드값 납부일이다.

두 날짜를 일부러 같이 해놓는 속셈을, 직장인들은 잘 알 것이다. 손에 닿기도 전에 모래알도 아니고 물처럼 새나가는 월급 속, 신용불량자가 되지 않기 위한 안전장치라는 것.


그런데 우리 사랑스러운 우리 카드는, 아침에 내 월급이 들어오기도 전인 (주로 아침 9시에 들어온다.) 무려 새벽 세시에, 양아치처럼 돈을 빼내가려고 하고 있었다.


월급 전날이라 통장엔 247원밖에 없었는데 말이다!!!!!!!!!!!!

마땅히 아침이 밝아오면 내가 성실히 내려고 한 돈의 극히 일부였는데, 그걸 삥 뜯긴 기분이었다.

새벽 세 시, '보이지 않는 손'의 하수인인 우리 카드라는 양아치가 와서 247원을 삥 뜯어갔다.

카드값은 그 2000배가 넘는데... 얜 지금 큰돈 앞에 두고 작은 돈에 연연해 인심 잃은 꼴이다.


업무는 9시에 시작하면서 왜 카드값은 새벽 세시에 빼가는 건데?

내가 낼 돈이 50만 원이 넘는데, 새벽 세 시에 247원 미리 가져가서 잔액을 0으로 만들어서 나를 빈털터리로 만드니 기분이 좋니?

나는 기분이 정말 나빴거든. 너 진짜 그러는 거 아니다.

우리 같이 생각을 해보자, 우리 새끼... 많이 힘드니?

내가 너에게 돈 안 갚으려고 한 적 있었니? 내가 너에게 그렇게 신의가 없었니?

그리고 너, 내가 핸드폰을 무음으로 해놓고 살아서 다행인 줄 알아.

새벽 2시 49분에 '띵동'하고 울렸으면 난 정말 더 화가 났을 것 같단 말이지. 자다 깼다면 더욱더!!!!!


휴... 떨리는 마음을 간신히 진정시키며 아침에 일어났더니 월급이 들어와 있었고, 5월은 보너스 달이라 거의 한 달 치 월급이 보너스로 들어와 있었다. 아아 행복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뺨따귀를 맞은 것 같은 어젯밤의 마음이,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치유되었다.


우리 카드가 늘 카드값을 월급보다 일찍 뺀다는 건 알았지만 그게 새벽 세시라는 건 처음 알았다.

그리고, 고작 247원을 빼내기 위해 그렇게 부지런을 떨던 양아치는,

정작 일을 해야 할 업무 시간엔 일을 안 하는지 마저 내야 할 돈은 오후 4시 이후에 빠져나간다.

물론 나는 또 삥 뜯기는 느낌이기 싫어, '결제일 바로 결제'를 눌러 아침 일찍 카드값을 털어버렸다.


이 일을 통해 나는, '우리'에게서 마음이 조금씩 멀어지게 된 것 같다.

어쨌거나 나는 '우리'라는 단어를 미명삼아 개인의 자유를 야금야금 제한하는 것을 못 참아하는 사람이니, 이건 어쩌면 우리 사이의 예견된 헤어짐의 전조가 아닐까...


우연의 장난처럼, 애플페이 쓰려고 시켜둔 현대카드가 마침 오늘 도착했다. 헤어진(질) 카드는 새 카드로 잊는다고 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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