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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 통보를 받은 직장인을 위한 위로

퇴직이 아니라 졸업이나 자퇴라고 생각하세요

by 회사선배 INJI


대기업 직장인으로서 40대 후반,

매년 걱정했지만 올해는 실적이 그나마 괜찮아서 '그냥 넘어가나?'했는데 결국 가장 두려워하던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갑작스러운 메일과 전화 한 통에 20년이 넘는 직장생활을 마무리 해야만 하구요.


전화를 끊고 나니까 퇴근이 마렵습니다.

정신은 없지만 슬프진 않구요.

그냥 차분하기만 합니다.

하지만 사무실에는 더 이상 있을 수가 없습니다.

후배들 보기도 창피하고 후배들도 저의 눈치를 보고 있으니까요.

어디론가 가야겠는데 마땅히 갈 곳이 없습니다.


다행히 상무님이 불러서 위로를 합니다.

"이게 직장인의 숙명이고 나 또한 언젠가 같은 순간이 올거라고.."

하지만 당신의 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고 위로가 되지도 않습니다.

솔직히 당신 때문에 이렇게 된거니까요.


어쨌든 저는 내일부터 출근할 필요가 없는 직장인이 되었습니다.



갑자기 입사했을 때가 생각납니다.

가진 것도 없고 아무것도 모르면서 시작된 직장생활이 너무 힘들었지만 좋은 일도 많이 기억납니다.

솔직히 입사했을 땐 CEO나 최소 임원이 될 줄 알았는데,

아쉽게도 한 끗이 부족했습니다.

사람들은 그 한 끗을 성과가 아니라 평판이라고 했구요.

개인적으로 충분히 동의합니다.

하지만 나름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하고 제 자신을 칭찬해 주고 싶습니다.


어쨌든 아쉽기는 하지만 시원섭섭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내일이 되면 감정이 또 다르겠죠?

그냥 내일은 내일 생각하고 오늘은 제 기분에 충실하고 싶습니다.



갑자기 퇴사 통보에 대해 가족에게 이야기하기가 겁이 납니다.

왠지 내일이나 그 이후에 하고 싶구요.

평소에 상황을 대충 이야기해서 별 문제는 없겠지만,

그래도 막상 퇴사 통보를 받았다고 말하기가 너무 두렵습니다.

그리고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생활비는 어떻게 하고 회사를 다닐지 아니면 개인 사업을 해야 할지 결정해야 되겠죠?

사실 그동안 고민은 많이 했지만 결정은 아무것도 못했구요.

당연히 준비도 부족하죠.

하지만 일단 몇 개월은 그냥 쉬고 싶구요.

솔직히 20년 넘게 직장생활을 했는데 일년 정도는 쉬어도 괜찮지 않을까요?


그래서 선배들이 스페인 순례길을 가거나 몇 개월 동안 배낭 여행을 떠났던 것 같습니다.

지금 제 마음이 그렇거든요.

어쨌든 머리가 너무 혼란스럽고 복잡합니다.



그리고 20년 넘게 대기업을 다니면서 뭐라도 된지 알았는데 사실 알고 보니 저는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인맥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모두 회사라는 플랫폼에서만 존재했던 거구요.

그 동안 제가 잘했던 것이 아니라 회사가 대기업이라 가능했던 것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솔직히 저의 능력이 아니라 회사의 능력이었구요.

그래서 퇴사 이후에 무엇을 해야 할지 계속 고민만 했던 거죠.

이제는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해야만 하구요.


하지만 새롭게 시작하기 전에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회사를 몇 년 다녔지? 그동안 너무 고생했어!"라는 말이죠.

제가 저에게 해주긴 했지만 사랑하는 가족에게 이 말을 꼭 듣고 싶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 생각이야?"라는 말은 오늘은 피하고만 싶구요.

두렵지만 이제는 회사가 아닌 진짜 저 자신을 믿어야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지금 저와 같은 직장인들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습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너무 고생하셨습니다.

오랜 시간 걸어온 길,

당신의 열정과 노력이 쌓여서 지금의 모습이 되었을 겁니다.

그리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는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은 무엇을 하더라도 잘하실 거구요.

분명 지금보다 더 행복할거라고 확신합니다.


그러니 퇴직 통보를 받은 이 순간만큼은 당당했으면 좋겠습니다.

퇴학이 아닌 자퇴라고 생각하자구요.

저는 여러분들이 졸업했다고 생각합니다.

원래 직장인은 입사는 같아도 졸업은 다 다르잖아요.

그 동안 너무 수고하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말을 저 자신에게 조용히 했던 것 같습니다.




인자하고 지혜로운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https://youtu.be/FvA6b4h7HH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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