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되어 있어야만 티 나는 일_육아와 집안일
우리가 아이를 셋이나 낳고 나서 직업적인 계발을 못하고 있잖아.
여보는 계속 휴직 중이고 나도 물론 돈을 벌고는 있지만,
사업을 한다던가 하는 그 이상의 계획은 잠시 멈춰 있잖아.
이런 상황에서도 무언가 끊임없이 자기만의 성장을 위해서 노력하는 것,
여보가 하는 일들이 굉장히 좋아 보여.
꼭 필요한 일인 것 같아.
아마 나처럼 경력단절이 긴 여자들은 ‘육아’만으론 삶에 만족하긴 힘들 거야.
공부도 할 만큼 했고, 일도 해보고, 직업적 성취도 가진 여성이
출산과 더불어 강제로 집에 매여 살게 되면 우울할 수밖에 없거든.
이건 아이를 사랑하느냐 아니냐 와는 전혀 다른 문제지.
인생의 의미나 삶의 기쁨은 ‘나로서’ 온전히 누리는 기쁨이어야 하는데,
나의 이름과 직업과 성취를 내려놓고 오로지 육아 만으로 기쁨을 느끼기엔
육아는 너무 지치는 일이야.
눈에 보이는 성과나 결과물이 없이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하는 일이지.
대신 문제가 생기면 엄청 티가 나는 일이고.
집안일도 그러고 보면 정말 ‘티가 안 나는’ 일 같아.
뭐랄까. 안되어 있어야만 티가 나지.
되어 있으면 티가 안 나고.
여보 퇴근 전에 내가 식탁 밑이랑 매트 아래 다 닦았는데.. 몰랐지?
거봐. 이런 일들.
뭔가 집이 제대로 굴러가도록 윤활유 역할만 하는 일들.
나는 이런 티 안 나는 일을 매일 하며 살기엔 너무 동기부여가 안되거든.
나는 여보를 만났기에 아이를 셋이나 낳을 수 있었다고 생각해.
그렇지만 아이를 셋이나 낳았기에 내 직업에서 할 수 있는 성취들은 보류했지.
근데 막상 이렇게 내 직장에서 강제로 떨어져 있다 보니까.
그래서 몇 년을 수학 문제만 풀던 일상에서 살짝 떨어져 보니까.
그제야 내가 좋아하는 게 보이더라고.
나는 몰랐던 걸 알고 싶은 욕구가 많았다는 걸.
읽고 싶은 책과 배우고 싶은 것들이 많았다는 걸
나는 수학을 잘하지만 좋아하지는 않았다는 걸.
막상 애를 낳고 보니 옆에 치워뒀던 내가 보였어.
아이에게 쏟는 정성에 반의 반도 안되게나마 ‘나’에 대해 에너지를 쏟으면서,
내가 뭘 좋아하고 뭘 하고 싶은지 찾으려고 하고 있어.
그러니까 육아라는 건 ‘결과물’이 없는 일이야. ‘과정’의 연속이지.
근데 그러고 보니 내 인생도 그래.
취직하고 결혼하고 애 낳고...
그 결과물들로만 다 채워지지 않는 게 내 인생이더라고.
요즘은 그 너머를 생각해.
언젠가 지금 내가 좋아하고 탐구하며 사는 나의 과정들이
결과물이 될 거라고 생각해.
'나답다'라는 건 어쩌면 혼자만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가를 보면
알 수 있는 것 같아.
나는 새로운 것에 호기심을 느끼고 알아가고 싶어.
세상이 굴러가는 원리에 대해서도 궁금하고,
내가 사는 세상이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지도 궁금해.
앞으로 내가 어떤 걸 하고 살지도 궁금하고.
새로운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도 좋아하고,
읽고 생각하고 쓰는 모든 행위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아가고 있어.
어쩌면 꿈이 뭐냐고 물어보는 건
아이에게나 어른에게나 마찬가지로 중요한 일인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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