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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강철저 Feb 13. 2022

남편은 나를 갉아먹으려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육아는 제로섬이 아니다

독서 소모임에서 요즘 읽고 있는 책 <이기적 유전자>에서 '죄수의 딜레마'가 나온다.


'죄수의 딜레마'란 이렇다.

공범인 A와 B가 둘 다 자백을 하면 둘 다 10년형, A만 자백하면 A는 20년형이고 B는 5년형, 둘 다 자백을 안 하면 둘 다 풀려난다. 사전 모의는 할 수 없다. 이 상황에서 A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죄수의 딜레마'에서 가장 좋은 선택은 둘 다 자백을 하지 않고 함께 풀려나는 것이지만, 대부분은 상호 배신에 대한 유혹에 빠진다고 한다.


즉, 둘 다 자백을 안 하면 둘 다 풀려나는 걸 알면서도 나만 자백하고 상대는 배신하는 것이 두려워 나도 배신하는 선택을 한단다.


그 이유는 인간은 '시샘하기'때문이라고.


시샘은 '배고픈 건 참아도 배 아픈 건 못 참는'심리를 뜻하는데 나보다 남이 더 많이 가지느니 나도 안 받고 남도 못 받게 하겠다고 선택하는 심리기제이다.


누구에게도 득 될 게 없는데 고작 남이 잘되는 게 보기 싫어 눈앞의 나의 이익도 포기하게 만드는 이유는 뭘까.


인간은 공멸할 수밖에 없는 자기 파괴적 존재인가. 이런저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책에서는 이런 '시샘'은 세상을 제로섬(Zero Sum)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라고 했다. 


즉, 남이 많이 가지면 내가 적게 가진다고 바라보기 때문에 둘 다 많이 가진다는 걸 상상할 수가 없는 거다.


그래서 제로섬이 아닌 상황에서도 남이 많이 가지고 내가 적게 가지느니 나도 남도 모두 안 갖겠다는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 거였다.  


육아도 그렇단 생각이 들었다.


첫째만 키울 때엔 남편과의 사소한 언쟁은 대부분 '누가 더 힘드냐'였다.


물론 '내가 더 힘들다'가 기본가정이었기에 싸움은 늘 끝없는 평행선 같았다.


어느 날 남편이 하는 말이 유독 크게 들렸다.



"나는 당신이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걸 알아. 그리고 나도 최선을 다하고 있어.
그러니까 나보고 아무것도 안 한다는 식으로 말하지 말아 줘"


그랬다.

나는 그즈음 육아가 100이라면

내가 99를 하고 남편이 1을 한다고 생각해서 억울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근데 남편 입장에선 일하고 오자마자 집을 치우고 애도 보고 쉬지 않고 움직였으니 자기도 100중에 99는 아니어도 50 이상은 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였다.


결국 남편의 말을 듣고서야

나는 육아도 제로섬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그도 나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우리는 함께 윈윈하고 싶었다.


육아가 제로섬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99를 해도 남편이 1만 하는 게 아니라

남편도 99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더 어려운 것이다.


그 어려운 걸 함께 하려니 힘이 드는 수밖에...


어린아이를 키우는 부부는 둘 다 물에 빠진 상태와 같다는 얘길 들은적이 있다.


그래서 내가 숨을 쉬려면 상대가 잠깐 숨을 참고 나를 위로 들어 올려줘야 한다.


상대를 물속에 밀어 넣어야

내가 숨통을 틔울수 있다니...

너무 잔인하지만 너무나 와닿았다.


이 이야기를 읽고 남편의 고생을 인정해 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도 자기 나름대로 나를 숨 쉬게 해 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나는 남편이 하는 일을 의식적으로 찾아보기로 결심했다.


하나씩 찾을 때마다 짧고 담백하게 말했다.

고마워.


첫째를 키울 때에 우리는 주말부부였는데

주중에 혼자서 아이를 보다 보면 가끔은 숨이 턱턱 막혔다.


간신히 아이를 재우고 방을 나와 폭탄 맞은 듯 어질러진 주방을 보고 있으면 그냥 땅으로 꺼지고 싶었다.


그렇게 힘들 때마다 남편에게 원망의 화살을 돌렸었다.


니가 지금 여기 없어서
내가 이걸 혼자 견뎌야 하잖아.


어느 날은 더 이상 움직이기도 힘들 만큼 몸이 힘든데 내일 먹일 이유식이 똑 떨어져 있는 걸 발견했다.


남편에게 전화해서 엉엉 울 말했다.

너무 힘들다고. 너는 거기서 편하지 않냐고. 비난의 말을 쏟아내고 씩씩거리고 잠이 들었었다.


남편은 금요일 밤에 달려와서

주말 동안 그다음 주중에 먹일 이유식을 모두 만들어 놓고 갔다.

월요일 새벽에 혼자 일어나 준비해서 나가던 남편이 내 귀에 속삭였다.


이유식 일주일치 만든 건 냉동실에 넣어놨고, 여보 아침은 식탁에 차려놨어.


세상의 어떤 밀어가 이것보다 달콤할까.


나는 남편을 껴안고 볼을 부비며 말했다.


고마워.


진심이었다.


남편은 나를 육아 독박에 던져놓고 나 몰라라 도망가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하는 딸과 아내를 위해 새벽같이 일하러 나가는 가장이다.


남편은 나를 갉아먹으려고 존재하는 게 아니고 나와 함께 아이들을 잘 키우려고 애쓰는 존재이다. 그는 그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


내가 힘이 든다고 해서

그것이 남편이 무언가를 덜 해서가 아니고.

내가 많이 한다고 해서 남편이 적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육아는 제로섬이 아니다.


이렇게 남편의 '공로'를 본격적으로 찾아보고 인정해주고 구체적으로 칭찬하면서부터 우리는 싸울 일이 줄어들었다.


우리가 싸우는 건 우리 부부가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둘 다 피곤했기 때문에 싸우는 것이었다.


남편을 원망하는 것은

둘 다 자백을 해서 둘 다 10년형을 받는 것과 같다.


육아가 형벌이 된다.


남편이 하는 일을 진심으로 인정하고 고마움을 표현하는 것은 나와 남편 모두를 살리는 일이었다.


육아가 상이 된다.


남편의 노력을 인정하고 애정을 표현하고 진심으로 고마워하면서 우리에게 상이 많아졌다.


아이들의 보드라운 살결과 쑥쑥 커가는 몸, 생글거리는 웃음을 함께 바라보다 보면


서로가 있었기에 이런 사랑스러운 존재를 만날 수 있음에 감격하게 된다.


원망의 화살이 무의미함을 받아들이고

서로에게 고마움과 인정의 말을 더 많이 할수록 이런 감격의 순간을 함께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아이들을 바라보다가 남편과 눈을 마주치 될 때가 있는데 그럴 땐 서로를 향해 싱긋 웃게 된다.


분명 몸은 녹아내릴 듯 힘든데...

그저 이 순간들이 나중에 너무 그리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들이 어리고 부모의 몸과 사랑과 손길이 늘 고픈 이 시기가 나중에 우리보다 아이들의 키가 커지고 세상을 향해 성큼 나아가 버릴 때에 얼마나 그리워하게 될지 안다. 


그렇기에 지금우리 가족의 모습을 담뿍 눈에 담고 싶다. 


아이들의 모습을

그리고 남편의 모습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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