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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강철저 Feb 16. 2022

아이는 셋이구요 집에 티비는 없어요.

없으면 보이는 것들에 관하여

뭔가 거창한 이유가 있어서 티비를 없앤 건 아니었다.

25평 오래된 아파트에 50인치 티비는 너무 큰 자리를 차지 했다.

사람이 사는 곳에 티비가 있는 느낌이 아니라 티비가 사는 집에 우리가 얹혀사는 꼴이었다.

우리 집이 티비 보관소가 된 느낌.


거실에 있던 티비를 서재방으로 옮기고 나니 점점 더 안 보게 되었고

안 보면서도 매달 꼬박꼬박 나가는 티비 수신료 2500원도 아까웠다.

아파트 관리실에 수신료를 빼 달라고 했더니 집에 텔레비전 기계가 아예 없어야 된다고.


그날로 티비를 처분했다.     


집이 좁으면 미니멀 라이프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새로운 물건을 들이는 것은 여러번 고민하고

필요 없는 물건들을 버리는 것은 고민을 덜 해야 한다.

버리기를 까먹으면 금세 물건이 쌓이니까.

 

놀랍게도 물건들은 마치 곰팡이처럼 초기에 없애지 않으면 무서운 속도로 자가 증식한다.

티비가 있던 방이 창고가 되어있었기에 티비를 처분하면서 주변의 짐들도 함께 정리했다.

묵은 짐을 버리고 탁 트인 거실과 서재방을 보니 마음이 후련했다.


티비장만 다시 거실로 내와 그 위에 아이들의 장난감을 올려두었다. 서서 갖고 놀 수 있도록.

맞은편에 소파가 있어서 나는 아이들이 티비장위의 장난감들을 서서 갖고 노는 모습을 바라볼 때가 많다.

같이 놀아줄 때도 있지만 같이 놀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는 걸 더 좋아한다.

내가 소파에서 바라보는 뷰, 티비장 덕에 아이들은 서서도 잘 논다.


지인들이 우리 집에 놀러 오면 티비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묻는 말은 이거였다.


티비가 없으면 급할 때 어떻게 해?


그러니까 잠깐이라도 아이들의 시선을 고정시켜두고 무언가를 해야 할 때 어떻게 하냐는 말이었다.

엄마가 화장실에 가야 한다거나 뭘 만들어야 할 때거나 아니면 그냥 쉬고 싶을 때. 등등.


엄마가 화장실에 가야 된다고 말했는데도 울고 매달리면 그냥 울게 둔다.

'엄마 화장실 갔다가 올게.'라고 말해주고 그래도 울면 울게 둔다.


아이들은 울면서 기다림을 배운다.


자야 되는 시간이 지났는데도 안 자고 놀려고 하면

'이제 자야 할 시간이야.'라고 말해주고 각각 아기침대에 넣고 불을 끈다.

아이들이 계속 울면 다시 한번 말해준다.

이제 자야 되는 시간이야.


날이 갈수록 우는 시간이 점점 짧아지면서

아이들은 잠을 배운다.


나는 아이가 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운다는 것은 그저 자신의 생각의 표현이므로

그 표현에 대해 내가 어떻게 답을 해줘야 하는지를 고민한다.

아직 말을 못 하지만 말을 알아들을 순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최대한 하지만 단호하게 해준다.


아이가 우는 것에 대해 사과하지 않는다.

미안하지 않은 일에 대해 미안해하지 않는다.

 

대신 설명해준다.

무엇을 할 건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티비가 없어도 아이들은 

엄마의 말을 이해하고 기다릴 줄 안다.


그래서 티비를 없애고 나서는 불편함보다는 다음의 장점을 누릴 수 있었다.

  

1. 티비가 있던 공간이 빈 공간이 된다. 

우리 집은 오래된 20평대 아파트라 아무래도 인구밀도가 높은데, 티비가 사라지면서 티비와 관련된 공간들(티비장과 티비, 티비를 볼 수 있는 자리 등)이 모두 아이들이 놀 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 그저 텅 빈 공간이면 아이들이 물건을 올리고 빼고 넣고 쌓고 무너뜨리고 할 수 있다.


2. 아이들에게 티비로 협상을 하지 않아도 된다. 

언제까지 보고 언제 끄자고 실랑이할 필요가 없어진다. 티비를 없애고 가장 좋은 점 중의 하나가 이것이다. 싸울 일이 하나 줄어든다는 것.  우리 아이들도 여행을 가거나 할머니 집에 가면 티비를 넋을 놓고 본다. 다른 장난감이 있어도 티비가 훨씬 재밌기 때문이다. 그러나 집에 오면, 티비가 없는 집으로 오면 티비를 찾지 않는다. 놀 거리 할 거리를 찾는다.


3. 아이들이 스스로 놀이를 한다.

이게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티비가 없기 때문에 아이들이 티비를 보겠다는 생각에 매달리기보다는 장난감을 갖고 놀거나 집을 이리저리 탐색하는 시간을 많이 갖는다. 나는 아이들이 스스로 자기만의 놀이를 찾길 바랬다. 엄마가 하나하나 해줘야만 하는 걸 바라지 않았다. 때때로 지루해하기도 하지만 지루함을 티비로 해결해달라고 하지 않는다. 나는 지루함도 견디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아이들에게도 지루할 시간을 주고 싶었다. 혼자 노는 법 같이 노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4. 아이들이 서로에게 좋은 자극이 된다. 

어떤 자극이라도 사람과의 접촉보다 더 좋은 자극은 없다.

특히 지금처럼 밖에 나가면 마스크를 쓴 얼굴들만 만날 수 있는 시대에

같은 유전자 풀에서 태어나 같은 공간에서 같은 시대를 사는 남매와 맘껏 부대끼며 서로에게서 배우는 것만큼 좋은 자극은 없다고 생각한다.

싸우기도 하고 울기도 하지만 끌어안기도 하고 마주 보며 깔깔 웃기도 한다.

나중에 커서 기억은 못할지라도 따뜻한 정서로 가슴에 남아있으리라 믿는다.


5. 남편과 대화하는 시간이 늘어난다.

우리는 신혼초 퇴근하면 티비를 늘 켜놓고 생활했는데 둘 다 말없이 티비만 보거나 티비에 나오는 내용에 대해 집단 독백 같은 대화를 했다. 서로를 마주 볼 시간이 적었다. 오히려 아이가 셋이 되고 티비를 없앤 후부터는 함께 거실에서 빨래를 개면서도 이야기하고 아이들과 거실 매트 위에 다 같이 누워 뒹굴기도 한다. 부부 사이에 이런 작고 사소한 일상을 공유하는 것은 서로에 대한 애정의 끈이 느슨해지지 않게 해주는 것 같다.


 

아이가 태어나고 집이라는 공간을 어떻게 디자인하느냐는 나의 선택이었다.

아이들에게 수동적인 즐거움을 주는 게 아니라 스스로 즐거움을 찾기를 바랐다.


티비가 있고 없고는 사실 크게 중요한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다만 없으니까 알게 된 것들의 소중함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 당분간은 티비를 들이지 않을 것 같다.


가족마다 자기들만의 가족의식이 있다.

우리 집 가족의식 중에 첫째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가족 안아'인데,

온 가족이 강강술래 하듯 둥글게 서로를 끌어안고 얼굴을 가까이 붙이는 거다.

'가족 안아' 를 하면 5명의 얼굴이 가까워지는데 서로 옆사람의 볼에 뽀뽀해준다.

오른쪽으로 한번 쪽, 왼쪽으로 한번 쪽.


우리의 이런 '가족 안아'는 티비가 없는 자리에 자주 등장한다.


언젠가 다시 티비를 집에 들이는 일이 있더라도, 이런 순간들은 놓치고 싶지 않다.


정말 중요한 것들은 소중히 여기고

중요하지 않은 것들에게는 나의 에너지를 쏟지 않고 싶다.


내겐 티비가 주는 여유보다 가족이 함께 누리는 시간이 더 중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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