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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강철저 Feb 20. 2022

엄마가 힘든 육아는 제대로 된 육아가 아니다

지속 가능한 방식의 육아를 꿈꾸며

세 아이 모두 돌이 지나고 14개월이 되는 달부터 어린이집에 다니기 시작했다.


첫 아이를 어린이집에 처음 등원시키고는 뒤돌아서서 울었다면,

쌍둥이를 어린이집에 첫 등원시킨 날은 빠른 걸음으로 뒷걸음질 쳐서 나왔다.


해방이다!


쩌렁쩌렁한 내적 외침이었다.

진심으로 나는 이 해방의 날을 위해 버텨왔다.      


첫째만 낳아 키웠을 때엔 육아가 죄책감과의 싸움이었다.

미안해를 입에 달고 살았다.

우유 빨리 못줘서 미안해, 옷 젖었는데 빨리 못 갈아입혀서 미안해, 자기 싫은데 억지로 자라고 해서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그랬으니 첫째를 어린이집에 처음 등원시켰을 때엔 어쨌을까.

어린이집 입구에 들어서면서부터 나는 불안이 서린 동공으로 르게 교실을 스캔했다.

이 좁은 방에서 여섯 명이 함께라니... 우리 아이가 제대로 된 케어를 받을 수 있을까.

내가 뭐 대단한 걸 하자고 돌 지난 애를 어린이집에 보내는 걸까.


미안해하지 않아도 될 일을 미안해하는 나와 달리 첫째는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어린이집을 관찰했다.

울지도 않고 신기한 듯 선생님과 놀았고 내가 간다고 하자 손을 흔들었다.


그렇게 첫째는 생각보다 수월하게 적응했으나 나의 분리불안은 꽤 오래갔다.


아이가 어린이집에 가있는 동안 나는 집에서 끊임없이 서성였다.

뭘 해도 집중이 안되어 이걸 했다 저걸 했다 몸만 부산스럽게 움직이다가 하원 시간이 오기 전부터 스트레스가 시작되었다.


일명 하원 증후군.


하원 시간이 다가오면 갑자기 몸이 노곤해지면서 몸살 기운이 올라오고 갑자기 어지러워 못 나가겠다는 생각이 든 적이 있으신가요?


그게 바로 하원 증후군입니다!

(월요병이랑 증상이 비슷하지요. 어쩌면 메커니즘도 비슷한 것 같기도요.)


그렇게 하원 증후군을 이기고 만난 첫째의 얼굴은 만족감과 반가움이 서려있었다.

어린이집은 아이에게도 내게도 좋은 곳이었다.

아이는 형님반에 가서도 종종 놀다 왔는데, 엄마랑만 있다가 다른 언니 오빠들과 노는 경험을 하는 게 신기한지 좋아했다. 서서히 나도 마음을 놓았다.


아이가 어린이집에 가 있는 동안 흩어져있던 정신을 그러모아 나를 챙겼다.

운동도 시작하고, 책도 읽었다. 뭐 큰 거 안 해도, 비상벨이 울리면 달려가야 하는 일상에서 잠시라도 벗어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전이 되는 것 같았다.


곧 원하던 둘째가 생겼고, 둘째가 쌍둥이임을 알게 되었고, 첫째는 어린이집을 다닌 덕에 나의 잦은 입원에도 불구하고 무럭무럭 커갔다.


엄마의 역할을 어린이집 선생님이 나눠 가져주셨다.


어린이집에 안 다녔으면 둘째를 낳을 수 있었을까. 스스로에게 물어보면 도리질 치게 된다.


아이 하나를 키우려면 하나의 마을이 필요하다고 했나. 나에겐 어린이집이 마을이었다.


쌍둥이를 낳고 나서도 첫째는 어린이집에 잘 다녔고, 쪽쪽이를 뗐고 기저귀를 떼고 젓가락질을 하기 시작했다. 단짝 친구가 생겼고, 좋아하는 취향이 생겼다.


나는 혼자 아이를 키운 게 아니었다.

쌍둥이를 돌 전까지 집에서 보는 동안 첫째가 어린이집에 가서 즐겁게 지내고 오는 것이 감사했다.

어린이집에서 너무나도 잘 지내주는 아이를 보며 살뜰히 엄마의 공백을 채워주시는 담임선생님께 진심으로 머리 숙여 감사함을 표현했다.


엄마라는 무게에 허덕일 때에 묵묵히 내 손을 잡아주고 함께 짐을 나눠져 준 사람은 가족만이 아니었다.


모두 선생님 덕이예요


선생님도 같이 눈시울이 젖었다.


첫째의 담임선생님은 두 해를 연달아 담임을 해주셨기에, 쌍둥이의 임신기간과 돌 전까지의 시간 동안 안정되게 첫째를 돌봐주셨다. 어린이집 등원은 남편이 출근길에 했고, 하원은 친정엄마와 시어머니가 번갈아 해 주셨다. 나는 그맘땐 고양이의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심정이었기에 모두에게 도움을 구했고 머리를 조아렸다.


그렇게 1년을 버티고 드디어 쌍둥이 동생들도 돌이 지나 어린이집에 등원하기 시작했다.

누나가 옆 교실에 있고, 쌍둥이 둘이 같이 있어서 그런지 어린이집을 기어 다니며 신나게 탐색하느라 금세 적응했다. 아이들이 어린이집에 가 있는 시간을 좋아해 주어 기뻤다.

나 또한 어린이집에 아이들이 가있는 동안 혼자 있는 시간을 좋아하니까.

더 이상 떨리는 동공으로 교실을 스캔하지 않는다.

손을 흔들며 인사하고 들어가는 아이들의 모습에 나도 미소로 화답할 뿐.


아이들을 모두 등원시킨 후 뒤돌아 혼자 걸어 나오면 발이 둥둥 뜰 정도로 마음이 들뜬다.

아이를 셋다 어린이집에 맡기고 발이 둥둥 뜨는 엄마라니.

스스로가 웃기지만 그렇다고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바라볼지, 가상의 관객에 더 이상 연연하지 않는다.


나는 지속 가능한 방식의 육아를 꿈꿀 뿐이고, 어린이집은 그런 나의 육아의 방식 중 일부일 뿐이다.


어린이집을 보내는 것에 대해 안 좋게 바라보는 시각을 만날 때마다 아쉽다.

좋은 어린이집이 훨씬 많다. 좋은 선생님이 정말 많다.

좋은 선생님을 만나면 어린이집에 가는 것이 아이에게도 엄마에게도 모두에게 좋다.


아이는 새로운 어른과 또래와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거고,

엄마는 잠시 육아에서 벗어나 자신을 챙기며 충전할 수 있다.


엄마 혼자서 다 해야만 아이에게 좋은 게 아니다.

엄마가 힘들어야만 아이에게 도움이 되는 게 아니다.

힘든 육아는 제대로 된 육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랫동안 할 수 없으니까.

육아는 하루이틀만 버텨서 되는 단거리가 아니다. 장기전 마라톤이다.

아이를 키우는 과정은 희생의 과정이라기보다 즐거움의 과정이 되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우울한 엄마와 24시간 있는 것보다 잠시 떨어져 있더라도 몸과 마음이 건강한 엄마와 찐하게 함께 하는 것이 아이의 정서에 더 좋다고 믿는다.

어차피 나는 아이들이 어린이집에 가 있는 시간 말고도 쇠털같이 많은 시간을 아이들과 함께하니까.


누군가의 희생으로 굴러가는 가정은 건강하지 못하다.


나는 하루 이틀 육아할 게 아니니까,

나는 애가 하나 둘이 아니니까.

지속 가능한 방식의 육아를 꿈꾼다.


24시간 엄마와 붙어있어야 하고 3년은 끼고 키워야 한다는 말의 다른 면을 안다.

이는 엄마에게 드리우는 죄책감의 그물임을.


엄마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지속 가능한 방식의 육아를 하면 된다.


나는 맘까페에 '어린이집 보내도 될까요?'라는 질문을 하지 않는다.

내가 판단한다.

아이가 아프거나 컨디션이 안 좋으면 데리고 있는다.

그러나 건강하고 보통 이상의 컨디션이라면 아침을 간단히 먹고 등원한다.


나는 아이들을 등원시킨 후에 동네 뒷산을 산책하며 영어공부도 하고, 집에 돌아와서는 책도 읽고 글도 쓴다.

하루에 단 두 시간이라도 집중해서 나만을 위한 시간을 갖는 것만으로도 흩어진 정신을 모으는데 큰 힘이 된다.


어린이집을 보내고 안 보내기로 모성애를 판단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무의미한 것은 다른 사람의 시선을 미리 염려하여 휘둘리는 것이다.


100명의 사람이 있다면 100가지 방식의 사람 사는 모습이 있다.

육아도 어쩌면 살아가는 삶의 방식인 거니까.

나의 주관대로, 아이와 나에게 맞는 최적의 방식을 찾아가면 된다.


나와 우리 아이들에게 최적의 방식은 여러 명의 어른이 함께 아이에게 중요한 어른이 되는 거였다.

아이는 엄마 아빠만큼이나 양가 할머니 할아버지와 이모와 고모와 어린이집 선생님들과 좋은 관계를 맺는다. 엄마의 짐을 덜어주는 다양한 어른이 있는 것은 엄마에게도 좋지만, 아이의 삶에서도 다양한 어른과의 관계가 삶을 다채롭게 한다고 믿는다.


아이들의 삶이 다채로워질수록 나의 삶도 함께 풍요로워진다.

서로에게 만족감을 주는 관계가 지속 가능한 관계이다.

아이와 지속 가능한 관계를 맺으며 평생의 삶을 이어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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