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면 AI가 만든 걸까?
앨런 튜링은 기계가 지능을 갖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내가 대화하고 있는 상대가 인간인지 기계인지 구분할 수 없을 때 그 기계는 지능을 갖고 있다고 간주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것을 이미테이션 게임이라고 불렀다.
유발 하라리의 책 <넥서스>를 읽다 보니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어떤 글이 AI가 쓴 글인지 인간이 쓴 글인지 구분이 안 되는 순간이 곧 도래할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자꾸만 든다.
1. 독서소모임에서 리뷰를 남기는데 그걸 따로 기록해두지 않다가 요즘은 내 독서기록을 제미나이에게 학습시키고 이를 블로그 용으로 바꿔달라고 했더니 역시나 많이 보던 형태로 바꿨다. 블로그 말투로 소제목과 번호를 달아 정말 그럴싸하게 정제된 글을 뚝딱 만들어냈다. 그렇다면 이 글은 내가 쓴 글일까? AI가 쓴 글일까? 아니면 나와 AI의 지분이 5:5인 공동명의인 글일까? 이 글로 만약에 소득이 생긴다면 그것은 온전히 나의 것일까? 아니면 제미나이에게 비용을 일부라도 줘야 하는 걸까?
2. 웬만한 공산품들이 메이드인 차이나가 된 것처럼, 곧 닥칠 미래에는 웬만한 글이나 이미지나 음악들이 메이드바이에이아이가 되는 건 아닐까. 반면 수제로 만든 것이 비싼 가격을 받고 소량만 생산되듯이 인간이 만든 것은 좀 더 가치를 쳐주거나, 엘피판처럼 전시되고 수집되는 마니아들의 기호품이 되는 건 아닐까?
3. '세금을 어떻게 부여할 것인가?'이게 크나큰 문제라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하라리의 전작인 <사피엔스>에서 인간이 최초로 발견한 기록인 점토판의 기록이 세금징수서라는 사실을 읽고는 웃음이 났는데, 넥서스에서도 세금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넥서스라는 단어 자체가 세금을 징수하는 범위를 뜻하는데 지금까지는 세금을 걷기 위해 물리적인 공간이 필요하고 화폐에 세금을 부여했다면 이제는 온라인상에서 마치 물물교환처럼 정보로 정보를 주고받는 시대가 왔다. 이렇게 되면 화폐에 세금을 부여하는 것이 의미가 없어지고 화폐경제는 축소한다. 결국 지금 내가 지폐와 동전을 모으는 게 마치 옛날 사람들이 먹을 걸 사기 위해 조개껍데기를 모으는 것과 같아지는 건 아닐까. 두려움이 몰려온다. 원화가치가 떨어질수록 그 공포는 배가된다.
4.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쓸모없는 것을 좋아하고 비효율을 향유하는 능력과 정신적인 사치로서의 글쓰기가 계속되지 않을까. 그냥 좋아서 하는 일들은 AI에게 넘기지 않지 않을 수도.
5. 유튜브 수익의 대부분은 킬링타임용 쇼츠라고 한다. 현대인들은 뇌를 빼놓고 쇼츠를 보는 걸 좋아한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전두엽 기능을 대기모드로 두고 파충류의 뇌라 불리는 영역만 활성화시킨 후 입에 먹을 것과 유튜브 프리미엄만 주면 며칠이고 집 밖에 나오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들이 우후죽순으로 늘고 있다. 마치 <멋진 신세계>에서 소마를 먹듯, 인간에게 밥과 유튜브를 주면 인간은 거기에 길들여진다. 그에 반해, 누가 시키지도 않는데 두꺼운 종이책을 모여 앉아 같이 읽고 목적 없이 책과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도 있다. 양극화라기보다는 인간이 자신의 뇌를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길어진 인생에서 삶의 방향이 전혀 달라질 수도 있다.
6. 러다이트운동처럼 컴퓨터를 때려 부수지는 못해도 AI가 만든 정제된 글을 거부하고, 거칠고 문맥에도 맞지 않고 맞춤법도 종종 틀리더라도 그 속에 날 것 그대로의 생각을 담고 미숙함을 보이는 인간의 글이 살아남을 수 있지 않을까.
7. 그런 의미에서 제미나이가 정제해 준 글을 올리지 않고, 인간의 서툼과 허술함을 사랑하는 반동분자의 마음으로 날것 그대로 생각인 이 글을 올린다. AI가 주는 정리되고 완벽해 보이는 글을 거부하고, 비효율적이고 뭉툭하고 불완전해 보이지만, 그럼에도 그 안에 인간들끼리만 알 수 있는 바이브를 글자와 글자 사이에 몰래 심어놓고 싶다.
8. 고로 이 글은 인간이 쓴 글이다.
9. 근데 만약에 이것도 AI로 인해 내 생각이 오염된 거면 어쩌지?
10. 틀 속에 살면서 틀 밖을 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