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에 무제로 태어난 생은 없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표현해야해. 전문적인 평론가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작품을 가장 잘 아는 것은 작가니까. 그런 부분에서 서예는 한없이 부족한 것 같아. 작가가 하는 작품 PR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부분이야.”
작품에 대한 설명을 작가가 직접 나서는 것은,
오히려 작품을 깎아내리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것은 어찌 보면 관람자들에게 생각의 여유를 주지 않는 것이기에.
그래서 작품의 제목 역시 “무제”인 경우도 더러 있다.
나 역시 그런 주장에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그런데 학부시절,
“작가라면 더욱 적극적으로 작품을 어필해라.”는 디자인과 교수님의 아주 반대적인 말씀이 가슴 깊게 와 닿았던 적이 있었다.
세계일주 때, 영국 내셔널 갤러리에서의 일이다.
팀원들과 함께 작품을 관찰했다.
사실 관찰이라기엔 민망하고, ‘둘러보기’ 정도였다.
멋있고 화려한 작품들이 많았으나
미대생으로서 팀원들에게 당차게 이야기 해 줄 수 있는 것은, “이 색이 검정색처럼 보이지만, 안에 빨간 색이 섞여 있을 것이야.” 정도였다.
잠시 점심을 먹고 다시 들어온 갤러리.
이번에도 의미 없는 걸음을 계속할 수 없어서,
오디오가이드를 하나 빌렸다.
리더는 오디오가이드를 듣고 우리에게 작가가 어떤 생각으로 작품을 했고, 완성할 당시에 어떤 상황이 있었는지를 설명을 해주었다.우리는 그의 목소리를 통해 작품을 천천히 음미했다.
그 순간 머릿속에
‘이런 이야기를 작품의 주인이 해준다면 얼마나 귀할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가 자기 작품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이 작품을 깎아 내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측면에서 서예는 글자를 쓴 것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대중과 많은 소통을 하지 못했던 것은 우리가 조금 더 솔직하지 못하고, 친절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음을 알았다.
시 하나 고를 때에도 절기에 맞게 고르며,
분위기에 맞는 필체를 쓰려고 노력하며,
획 하나에도 큰 의미를 두고 썼으면서
그것을 왜 설명하려 하지 않았을까.
종이와 먹, 그리고 붓을 골랐을 때에도
분명한 이유가 존재했으면서.
유유由有 까닭이 있다.
하나의 점을 찍고 획을 그을 때에
아무 이유 없이 붓을 휘둘러서는 안 되며 이유가 있어야 한다.
굳이 글씨가 아니더라도,
우리가 살아가면서 생기는 모든 일에는
아주 작더라도 분명한 이유가 있다.
생명체가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것도 건강한 삶을 위해서이고,길가에 핀 민들레도 씨앗이 자리를 잡았기에 자신의 생을 그 곳에서 충실히 살아내기 위해서 인 것처럼.
이 세상에 무제로 태어난 생은 없다.
그렇기에 내 삶의 이유를 누군가와 소통한다면
세상은 더욱 예술에 가까워지지 않을까?
새 글은 매주 화요일, 그리고 금요일에 올라옵니다.
서예인 / 인중 이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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