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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중 이정화 Nov 17. 2019

방패에는 창이, 창에는 방패가.

때때로 놓치며, 언제나 반성하며.


‘띵동, 입금되었습니다.’     


먹을 벼루에 갈아 붓을 몇 날 며칠을 못살게 굴면서 나의 영혼을 담았는데,

이 메시지 속의 ‘영’의 흔적은 왜 이렇게 적을까.

마음의 평온을 주는 작품의 가치를 이토록 몰라줄까.

날씨도 춥고 허하면서 섭섭한 마음을 빨리 채우려고 두리번대다가 발견한 붕어빵가게.

3개에 천원이라는 가격표가 붙어있다.

하지만 이 골목 지나면 4개에 천원인 붕어빵이 있으니

그곳으로 가는 것이 낫겠다며 발길을 재촉했다.     


우리는 언제나 창과 방패를 양 손에 하나씩 쥐고 있다.

창속에는 방패를 숨기고, 방패 속에도 창을 숨기며.

하지만 어쩌겠는가.

결국 쓰기 위하여 벌고, 죽기 위하여 살아가는 생명체인 것을.

삶은 언제나 모와 순, 즉 극과 극을 순환하며 존재한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인간은, 나는 아주 약았다.     


사실 창은 방패가 있어야 존재의 이유가 있고,

방패 역시 창이 세상에 없다면 굳이 필요가 없을 지도 모른다.

가득 차있는 잔을 비우는 이유는 그만큼 채우기 위해서이고,

채운 그 잔은 또 어서 비우라고 하지 않는가.

악착같이 모으는 이유는 마구 소비하고 싶은 이유와 같으며,

모든 생명체가 열심히 살고 있다는 것은 결국 열심히 죽음으로 달려가는 결과를 안기지. 

    

나는 매일 내 작품을 남에게 안겨주는 생산만 하는가?

다른 사람들이 열심히 만든 작품들을 소비하는 경우는 정말 없는가.

내 작품의 가치를 인정해 주지 않으면 열정페이를 강요하지 말라고 소리치다가

시장에서는 할머니가 캐 오신 나물을 왜 그렇게 열심히 깎으면서

<시장인심>이라고 덧씌우고,

이집 커피는 맛있기도 하고 <가격이 착하다> 라며 좋아할까.     


우리는 모두 예술을 하고 있다.

밭에 나가서 논을 매는 농부도,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회사원도,

매연이 가득한 지하에서 주차를 지휘하는 아르바이트생들 까지도.

우리는 나의 밭이, 나의 문서가, 주차된 차들이

더 아름답게 보일 수 있도록 예술을 꿈꾸며 그 삶은 결국 예술이 된다.      

모순. 방패모양의 창, 창 모양의 방패.

창속에는 방패가 살고 있고 방패 속에는 창이 살고 있는 것처럼,

그들의 삶 속에 나의 작품이 있고,

나의 삶 속에도 아주 깊게 그들의 작품이 자리하고 있다.

그것을 때때로 놓치며, 언제나 반성하기를 반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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