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사랑해.
마감을 해야 하는 작업이 많았다.
틈이 나면 하자고 마음을 먹고 주섬주섬 가방 속에 담았다.
내가 선택한 일들이지만 가끔은 나의 숨을 옥죄어 오는 것들.
그래도 이래야 내가 빛날 수 있으니까.
새로운 해를 맞이하거나 보름달이 차오르는 날이 되면,
할머니의 가지들이 열매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각자의 추억이 가득한 ‘언메기 맨 끝집’이라고 불리는 할머니 댁에 모인다.
사촌동생이 가방에 숙제를 들고 온 것 같은데, 윷놀이를 하느라 까맣게 잊은 듯하다.
그 모습을 보니 가방 속 나의 일거리가 불현듯 떠올랐지만 눈을 질끈 감으며 잠시 외면했다.
대식구들의 모임에 주방이 매우 바쁘다.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서 먹고 설거지까지 완료한 시간.
그 많던 식구들 모두 낮잠을 실컷 잤다.
얼마 후 하나 둘 일어나 함께 과일을 먹으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이어 나가고 있는데
구순이 훌쩍 넘으신 할머니가 한마디 하셨다.
“아이고. 오늘 같이 이렇게 행복 시러운 날이 또 있을런지 모르겄네~
나 니들 보고 싶어서 쫌만 더 살아야겄다!”
얼른 세상을 떠나 가족들이 편히 지내는 것이
당신의 최대 소원이시라는 할머니가 우리를 보면서 생의 이유를 찾으신다.
보이지 않는 미래를 위해 치열한 하루하루를 보내면서도 스트레스가 가득한 우리의 삶.
쉼은 사치일 뿐이라며 앞만 보고 달리는 것이
오히려 행복으로 가는 방법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곳에서는 아무것도 이루려 하지 않고 오로지 본능에만 충실했다.
졸리면 잠을 자고 배고프면 일어나서 끼니를 해결하며,
함께 모여 사소한 이야기를 주고받은 것이 전부인데
우리의 존재가 반짝 빛나서 구순이 넘은 할머니의 삶에 행복회로를 켜고 있다니.
명절이 만들어 진 것은 아마도 바쁜 거 다 알지만
억지로라도 쉼표 하나 찍고 가라는 선조들의 마음이 아니었을까.
굳이 차례를 지내지 않더라도, 곡식도 알맞게 익었으니까
여기 와서 우리를 핑계로 오랜만에 다 같이 모여 맛있는 거 먹으면서 이야기 꽃 피우라고,
아무 것도 안하더라도 예뻐 죽겠는 너희라는 걸 그 바쁜 시간 속에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이 우리에게 선물해 주신 시간이 아닐까.
꽃은 한 때 꽃이었던 흙이 키워준다.
할머니는 웃고 있는 우리를 향해서 한마디 더 덧붙이셨다.
야들아. 만약에 내가 증말 읍서져두
이렇게 다들 모여서 재미지게 놀아라, 알았지?
나두 꼭 올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