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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중 이정화 Oct 18. 2019

나의 작은 선생님

모추자(毛錐子) : 붓의 다른 이름



이 붓이 정화랑 잘 어울리네    

젓가락 사용을 배울 즈음,

부모님께서 작은 붓 하나를 쥐어주셨다.    


커서 언니가 되면 준다고 하신 붓.

생각보다 일찍 받은 것 같아서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먹이 가득한 벼루에 푹- 담그고

화선지 위에 글을 쓰려는 순간,

종이에 먹물이 사정없이 떨어졌다.    


떨어진 먹물은 종이에 멈춰있지 않고 점점 커졌다.

분명 나는 글자를 쓴 것임에도 불구하고

틀려도 지우개로 지울 수가 없다.


나는 그저 당황하며 바라만 보았다.    





그때의 어린 나는 미처 알지 못했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니 작은 붓은

어린 나에게 ‘침착함’을 알려주고 있었다.        



워-워. 진정해.
지금처럼 마음의 준비 없이 일을 서두르다 보면,
원치 않던 먹물이 떨어지는 것처럼
의도치 않은 다른 일이 생길 수 있어.
그 일은 종이에 스며드는 먹물처럼
점점 커져서 걷잡을 수 없게 되고,
아무 일도 없었던 상태로 돌이킬 수 없어.
‘침착한 마음’이 없다면,
한 순간 다 망가져 버릴 거야.
그런데…….         



떨어지는 먹물에 놀라 끝까지 듣지 못한 붓의 이야기.

그와 더 친해진 후 스무 해가 지난 지금,

붓의 이야기에 다시 귀 기울여보았다.


그러다 보면,
너의 삶의 어느 일부분이 되어
조금 더더욱 성숙하게 해 줄 거야.
그러니 너무 크게 놀라지는 마.
우리 잘해보자!’    


다시 생각해보면,

떨어진 먹물은 종이를 까맣게 다 뒤집을 정도로

커지지도 않고, 번지는 먹의 색은 점차 연해진다.

그는 기쁘면 감정을 배로 증가시킬 수 있도록 도와주고,

슬플 때면 종이 위에 토해 내어

내 마음을 다독여주기도 했다.

그에게 위로를 받으며 지낸 시간이

벌써 스무 해가 넘어갔다.    


붓을 잡은 꼬마 인중, 1997.


털 모.

송곳 추.

스승 자.    


언제나 보드라운 털의 모습으로 포근히 감싸주지만,

때로는 송곳처럼 날카로운 가르침을 주기도 하는

나의 오래된 작은 선생님,

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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