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추자(毛錐子) : 붓의 다른 이름
이 붓이 정화랑 잘 어울리네
젓가락 사용을 배울 즈음,
부모님께서 작은 붓 하나를 쥐어주셨다.
커서 언니가 되면 준다고 하신 붓.
생각보다 일찍 받은 것 같아서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먹이 가득한 벼루에 푹- 담그고
화선지 위에 글을 쓰려는 순간,
종이에 먹물이 사정없이 떨어졌다.
떨어진 먹물은 종이에 멈춰있지 않고 점점 커졌다.
분명 나는 글자를 쓴 것임에도 불구하고
틀려도 지우개로 지울 수가 없다.
나는 그저 당황하며 바라만 보았다.
그때의 어린 나는 미처 알지 못했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니 작은 붓은
어린 나에게 ‘침착함’을 알려주고 있었다.
워-워. 진정해.
지금처럼 마음의 준비 없이 일을 서두르다 보면,
원치 않던 먹물이 떨어지는 것처럼
의도치 않은 다른 일이 생길 수 있어.
그 일은 종이에 스며드는 먹물처럼
점점 커져서 걷잡을 수 없게 되고,
아무 일도 없었던 상태로 돌이킬 수 없어.
‘침착한 마음’이 없다면,
한 순간 다 망가져 버릴 거야.
그런데…….
떨어지는 먹물에 놀라 끝까지 듣지 못한 붓의 이야기.
그와 더 친해진 후 스무 해가 지난 지금,
붓의 이야기에 다시 귀 기울여보았다.
그러다 보면,
너의 삶의 어느 일부분이 되어
조금 더더욱 성숙하게 해 줄 거야.
그러니 너무 크게 놀라지는 마.
우리 잘해보자!’
다시 생각해보면,
떨어진 먹물은 종이를 까맣게 다 뒤집을 정도로
커지지도 않고, 번지는 먹의 색은 점차 연해진다.
그는 기쁘면 감정을 배로 증가시킬 수 있도록 도와주고,
슬플 때면 종이 위에 토해 내어
내 마음을 다독여주기도 했다.
그에게 위로를 받으며 지낸 시간이
벌써 스무 해가 넘어갔다.
털 모.
송곳 추.
스승 자.
언제나 보드라운 털의 모습으로 포근히 감싸주지만,
때로는 송곳처럼 날카로운 가르침을 주기도 하는
나의 오래된 작은 선생님,
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