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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중 이정화 Oct 25. 2019

물보다 진한 피, 피보다 진한 현玄

그 피가 어딜 가겠는가.

그때 나의 혈관에 들어온 혈색은
아마도 현색玄色이 아니었을까?



엄마는 마음이 아파서 좋아하지 않는 이야기.

하지만 나는 철없이 자랑하고 싶은 이야기.


다섯 살 꼬마 정화는

엄마아빠의 걱정에도 오히려 부모님을 토닥이며

울지 않고 씩씩하게 수술대에 올랐다고 한다.


그 당시 나에게 수혈을 해 주신 다섯 분 중 네 분이

모두 서예가 이셨다는 건,

서예와 나의 운명을 암시하는 복선임이 분명하다.


서예에 대한 깊은 고민과 사랑이 담긴 혈액을

조그마한 아이에게 모아주셨으니,

주사바늘을 통과해서 들어온 선생님들의 혈색은

아마 먹빛이었음이 분명하다.  

  

이제는 시간이 많이 흘러 그때 그 선생님들과 마주 앉아 술을 한잔씩 하게 되면,


‘그 조그맣던 녀석이 언제 커서 이렇게 술을 다 따라주냐.’며 기특하게 바라보신다.

다섯 분의 기를 추가적으로 받았으니,

그만큼 더 건강히 글씨를 쓰길 바란다는 말씀과 함께.

그래서 내가 서예에 더 깊은 애착이 있는지도 모른다.    


화선지에서 나오는 종이먼지들이 가득히 날아다니는

방에서 오히려 더 깊은 잠이 들고,

벼루에 묵은 먹 때들을 깨끗이 닦아 낼 때

샤워한 것 보다 더 상쾌한 기분이 들며,

착-하고 내 손에 달라붙어서

신나게 춤을 추는 붓에 흥이 나는 것을 보면

이건 필시 나의 몸 속 먹빛들이 자신들을 잊지 말라고

신호를 보내는 것이 분명하다.    


정말 그 피가 어딜 가겠는가?


목욕을 마친 귀여운 붓들,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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