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더 이상 그가 없다.

But,

by dindyuu

두 번째 회사를 약 4년간 다녔다. 정확히 말하면 3년 9개월.

그는 없었지만 그 빈 자리를 채워준 사람들이 있었다. 나보다 1년 늦게 들어온 동갑내기 후배와 그보다 늦게 들어온 후배 2명이 그의 공백을 채워주었고 덕분에 즐겁게 일할 수 있었다. 그렇게 넷이 대화방도 파서 업무시간에 이런 저런 얘기도 하고, 퇴근하고 술 한 잔 기울이며 잘 지냈다.


내가 하던 업무 중, 계절마다 한 권 발간되는(일명 계간지) 농·식품 관련 매거진 제작 건이 있었는데 실제로 현장 취재도 하고 직접 원고 작업도 하느라 출장이 꽤 잦았다. 경남 진주, 충남 당진, 서울, 양평 직거래 장터 등에 가서 사진도 찍고 사진도 찍히고. 예전부터 밖으로 나동기는 것을 참으로 좋아했던 나에게 잘 맞는 업무였다.


당진 아그로랜드 태신목장에 취재 나갔을 때 일이다.

운전이 서툰 나의 첫 사수의 차를 타고 취재처인 당진에 가다가 대형 화물트럭과 부딪힐 뻔했던 아찔한 일이 있었다. 죽는 순간 ‘주마등이 스친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그 때 알게 됐다. 가는 길에 공사장이 있었는데 그 길을 지나던 대형 트럭에게는 우리가 타고 있던 작디 작은 레이가 보이지 않았고, 핸들을 격하게 꺾어 피했던 그 아찔한 순간. 피하지 못했다면 대형 트럭과 부딪혔을 것이고, 더 많이 꺾고 멈추지 못했다면 논두렁에 추락했겠지. 뒷좌석에 같이 타고 있던 동갑내기 1년 후배도 나와 같이 주마등을 경험했다고 했다. 당시 운전자도 많이 놀랐을 것이다. 뒤에 두 명이나 태우고 있었으니까. 이 운전자가 바로 내가 퇴사하게 된 이유다. (이 내용은 뒤에서 다시 다루는 걸로)


이 회사에 있게 한 첫 번째 이유는 사라졌지만, 그 빈 자리를 채워준 많은 사람이 있었고 두 번째 이유가 굳건히 그 자리를 채워주고 있었기 때문에 오래 버틸 수 있었다. 그리고 ‘대리’라는 새로운 직급을 만난 곳도 바로 이 곳이다. 홍보대행사 3년차면 보통 대리가 된다. 나는 남들보다 조금 이른 시기에 대리라는 직급을 만나게 됐다.


이 회사에 있게 한 두 번째 이유인 당시 대표님에겐 신기한 점이 있었다. ‘대표’라고 불리는 것에 대해 부담스러워했다는 것.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 했던 홍길동처럼 대표를 대표라 부르지 못 한다? 그래서 우리끼리는 상무님이라고 불렀다. 물론 외부 미팅 등 대외적인 자리에서는 대표님이라고 했지만. 그리고 그녀의 집에서의 역할도 기억에 남는다. 성별로는 엄마지만 뭔가 아빠 같은 느낌이었다. 아빠(대표님 남편)는 약간 엄마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아빠가 집안일만 하는 건 아니었고 그도 다른 회사 대표님이었다.

대표님은 살림을 잘 하는 엄마보다는 일 잘하고 인성교육을 중시하고 아이가 뭘 하고 싶은지 빨리 파악하고 하고 싶은 대로 해주되, 하지 말아야 할 것은 단호하게 바로 잡아 주는 멋있는 부모님 같았다. 대한민국에 자리 잡고 있는 성별이 주는 역할에 갇혀 있지 않던 모습이 인상 깊다.


워낙 소규모 인원의 회사다 보니 전 직원이 함께 점심을 먹었다. 가끔은 더치페이, 가끔은 대표님이 사주시는 시스템이었다. 어느 날 11시 30분 즈음 되었을 때, 대표님이 스륵 일어나시더니 아주 밝은 미소를 띄며 ‘우리 날씨도 좋은데 한강 갈까?’ 하신다. 진짜 해맑게 말씀하셨다. 가지 않을 이유가 하나도 없다. 회사는 홍대고, 조금만 가면 바로 한강에 다다를 수 있는 위치였다. 망원지구 근처에서 곱창볶음을 먹고 자전거를 빌리고, 몇 명은 돗자리를 깔고 낮잠을 때린다. 막내였던 나는 ‘와, 회사가 이렇게 다닐 수도 있는 거구나.’ 하며 회사생활에서 느낄 수 있는 극강의 자유를 맛 보고야 만다. 다른 회사도 어느 정도는 그럴 줄 알았다.


한강에 가자고 했던 이유 중 하나는 대표님 앞으로 술 선물이 들어왔는데 집에 먹을 사람이 없다는 거다. 술 한 방울에 얼굴이 새빨개지는 그녀이기에 술을 회사에 기증(!)했다. 아마도 대표님은 알코올분해를 못하는 몸을 가진 듯 했다. 술 좋아하는 우리 팀장과 내가 있기에 그날의 양주는 금방 빈 병의 모습을 보였다. 이 때는 키다리 아저씨도 있을 때였는데 술 못 먹는 양반이 비싼 술이라고 같이 먹어서 더 빨리 없어진 것도 있다. 그리고 노래방 갔다가 바로 퇴근. 참 재밌었는데. 키다리 아저씨가 롹스피릿 쏟아내던 모습이 생각난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이 때는 키다리 아저씨가 사라진 지 꽤 오래 됐을 때다.) 그가 사라지고 직원 모두가 여성이던 시절이었다. 대표님, 팀장님, 내 위에 선배님(레이 운전자), 디자인팀장님, 디자인팀 팀원 2명까지 모두 여자였다. 당시 클라이언트가 캠핑용 꾸러미 세트를 출시했고, 이를 주제로 캠핑하는 컨셉의 콘텐츠를 제작할 겸, 놀러 갈 겸 한강에 가게 됐다. 사원들이 먼저 출동해서 세팅 하고 어르신들은 나중에 오는 시스템이었다. 숯불과 구공탄은 근처 매점에서 구매했는데 불을 붙여본 사람이 없었다. 펜션 사장님이 피워준 숯불에나 고기 구워봤지 다들 혼자 불을 피워본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숯을 향해 토치로 불을 연신 쏴보다가 구공탄에 먼저 불을 붙여야 한다는 설명서를 보고 또 한 번 토치로 불꽃을 쏴보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더운 날씨에 지쳐가고 있었다.


그런데 어떤 한 무리가 우리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 아마도 엔지니어? IT? 회사에서 단체로 온 모양이다. 한 3, 40명의 많은 인원 중 여자는 3명 정도 밖에 없었다. 버벅거리는 우리를 보다가 답답했는지 불씨가 살아있는 자신들의 숯을 가져다 주고 불을 붙여주셨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불을 못 피웠으니 아직도 아무 것도 못 먹었겠지. 본인들 화력으로 신나게 구운 고기에, 수박 한 통, 맥주 피처 등 아낌 없는 나무가 따로 없었다. 처음에는 '감사하지만 마음만 받겠다, 불 붙여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하다'고 정중히 거절했는데 한 잔 걸친 아저씨들을 이겨낼 수 없었다.


본의 아니게 우리 자리는 고기, 수박, 맥주 등 진수성찬이 되어 버렸다. 이제야 불을 붙였으니 우리가 가져온 고기는 여전히 생고기였고, 어르신들 오면 구우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어르신: 대표님, 우리팀 팀장, 디자인팀 팀장) 어르신들은 금요일 퇴근길에 붙잡혔고, 가까운 거리였지만 차가 막혀 8시경 도착했다.

세 명의 어르신 중 가장 어리지만 세상 꼰대 마인드 가득했던 우리 팀 팀장은 한 상 가득 차려진 우리 테이블을 보고 혼자 오해를 하게 된다. ‘어른들도 안 왔는데 감히 자기들끼리 먼저 먹었다’고 생각한 것. 더 무서운 건 이 당시 화를 내거나 물어본 게 아니라 그 다음 주 출근해서 나와 내 위 선배님(레이운전자)을 따로 불러 화를 냈다는 점이다.


“어른들도 안 왔는데 그렇게 너희들끼리 먼저 먹고 있는 게 말이 돼?”
“아니, 팀장님 그게 아니라 어제 그 것들은 (여차저차, 어쩌구저쩌구) …”


본인이 오해했음을 알게 된 팀장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그래! 그럼 그렇다고 치자!”


그 날 있었던 일 그대로 설명 했는데 그렇다고 치자? 어린 나는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다. 본인 생각이 틀렸을 때 보통 사람들은 ‘아, 그랬구나. 내가 오해를 했네.’ 정도의 멘트를 하지 않나? 내가 예상한 대답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내뱉으며 혼자 버럭 화내고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 모습에 적잖이 당황한 나였다. 그녀가 나가고 회의실에는 나랑 레이운전자만 덩그러니 남았다. 나는 레이운전자에게 이 상황이 도통 이해가 안 간다고 말했다. 이렇게 말해봤자 달라지는 건 없었지만 말이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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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찍은 사진이 용케 남아있네? 사진찍겠다고 가져간 매트가 참 귀엽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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