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알면서 중독되고 있어.
난 어떻게 해...?

로맨스를 못 쓰는 작가가 로맨스에 빠지다.

by INK

난 어렸을 때 이름만 대면 누구나 다 아는 L 이란 게임에 엄청난 현질을 한 적이 있다.

그래, 뭐 L이라고 하면 아는 사람들은 다 알겠지...

-맞다.

난 린저씨였다.

게임 내에서 강함이란 곧 돈이며, 강한 캐릭터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꼬인다.

물론 그들과 공식적인 오프라인의 만남을(주로 정모라고 불렀다) 가진 적은 없지만, 그렇기에 더욱 유명세를 치르던 시절이었다. 혈(길드)끼리 쟁(전투)을 하거나, 성을 차지하기 위해 대규모 전투를 치를 때면, 이 전투를 리드하는 사람이 필요하고, 주로 컨트롤이 좋고 전반적인 상황에 대한 이해도가 높으며 강한 캐릭터를 가진 자들이 이 자리를 차지했다.


난 연합을 지휘하는 연합 총사령관이었다.


별풍선이 터지고, 후원이 들어오고 그런 개념의 방송은 아니지만, 엄밀히 따지면 그 안에서 나는 지휘라는 목적의 방송을 하고 있었고 그런 나에게는 많은 귓속말이 쏟아졌다.

여성분들의 전화번호를 비롯, 개인적인 질문, 만나고 싶다는 얘기들...

그러다가 몇 번 스토킹을 당 한 적도 있다.

만나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전화와 문자 테러를 받은 적도 있고, 어떻게 알았는지 집 앞까지 찾아와 초인종을 눌렀던 분도 계신다.


"집에 있는 거 다 알아. 너 나올 때까지 기다릴 거니까 알아서 해."

하루 동안은 아무도 없는 척을 해 보았다. 하지만 다음날도 현관 밖에 인기척은 사라지지 않았고 결국 경찰의 도움을 받고 나서야, 나는 자유를 되찾았다. 그리고 한 달 뒤 이사를 갔다.

캐릭터를 정리하고, 유저들 사이에 '쉬어갈지언정 절대 접을 수 없는 게임'이란 수식어가 달린 이 게임을 결국은 접어버렸다.




한 번은 이런 적도 있다.

이건 게임 얘기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 제대 직후 잠시 모 통신사의 A/S 처리담당 상담원으로 아르바이트를 할 때였는데, A/S 처리담당이라는 게 좀 힘이 드는 자리다.


고객은 이미 불만을 탑재하고 전화를 하는 상황으로, 빠른 처리가 되지 않으면 온갖 욕설이 난무할 때였다.

(지금처럼 상담원 보호차원의 여러 장치들이 그땐 아예 없었다.)

옆에 있던 동료 누나가 전화를 받던 중,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는 듯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파트장님과 실장님은 강 건너 불구경이었고, 내가 전화를 넘겨받았다.

같은 남자가 상대하란 뜻이다.


남쪽지방 사투리를 쓰던 분이었는데, 자기네 집 인터넷이 안 돼서 지금 거액의 아이템을 날려먹었단다.

“마! 니들 지금 어디서 일하는 기고!

확 가스통 들고 가서 불 싸지르러 갈까? 이 XXXX들아!”

난리도 아니다.


조회를 해보니 미납요금이 너무 많아서 서비스가 중단되었던 것.


“인마 니가 돈 안내서 끊긴걸 나보고 어쩌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다.

“아휴 우리 고객님 너무 당황하셨죠? 어떻게 하죠?”

“이 새뀌가 지금 장난하나? 니가 뭔 도움을 준다꼬! 사장 바꿔라, 사장! 이 XXXX아!”

“고가의 아이템을 날리셨다니 제 마음이 더 아프네요... 저도 온라인 게임을 해서 그 마음 잘 압니다. 아이템 획득하려고 많은 돈과 시간을 투자하셨을 텐데..."

잔뜩 흥분해서 황소처럼 내뱉던 콧바람이 잦아드는 게 헤드셋 너머에서 느껴진다.


"아휴... 솔직히 고객님 상황은 저희 사장님이 아니라, 누가와도 처리가 안 되는 문제예요... 하지만 제가 조금 도움을 드릴 수 있는데 한번 들어보시겠어요?”

“... 뭐, 뭔데?”

“아. 별건 아니지만, 제가 잠시 인터넷 사용이 가능하게끔 열어드릴 수가 있어요. 뭐, 제 권한은 아니지만 실장님한테 얘기해서 바로 처리해 드릴 수 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라도 도움을 드릴까요 고객님?”

“... 그게 진짜 되나?”

“네 그럼요. 제가 어떻게 고객님께 거짓말을 하겠어요. 제가 컨펌받고 일 진행하면 15분 안에 처리됩니다. 지금 바로 그렇게 할까요 고객님?”

“하, 아 이거... 솔직히 이런 말 창피한데...”

머뭇대던 남자가 갑자기 고백을 했다!

“아까 전화받으시고 얘기 나누다가 솔직히 상담원님 목소리가 너무 조아가, 화가 많이 가라앉긴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까지 또 해주신다니 너무 감사하지요 저는...”

갑자기 아이템 얘기고 뭐고 쏙 들어갔다.


“네 다행입니다. 그럼 오늘이 oo 일이까. oo 일까지는 현재 미납된 요금 oooo원을 정상 납부하셔야 서비스가 끊기지 않으실 거예요. 기한을 넉넉하게 드리고 싶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입니다 고객님. 꼭 기억하시고 잊어버리실 수 있으니 문자로 발송해 드리겠습니다. 괜찮으실까요?”

“그래요, 고맙습니다. 부탁 쫌 할게요.”


물론, "내 목소리 나쁘지 않아."라고 말하는 에피소드지만 목소리가 주는 힘에 대해 얘기를 하고 싶어서 이렇게 떠들어 보았다.



첫 온라인 대면 이후 나는 매일같이 그녀가 읽어주는 책방을 찾았다.

방송이 늦어지는 날엔, 어디가 아픈 건 아닌지 걱정도 되었고 휴방 공지가 올라오면 가슴이 출렁 내려앉았다.


말이 되는 건가?

단지 신경 쓸 일이 많아져서 귀찮아서 내려놓았던 로맨스에 불이 붙었고

난 이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 이토록 빠르게 그녀에게 빠져들고 있었다.


꼭 이렇게 시작하면 결과가 좋지 않던데...





화, 금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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