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변명
“비양육 이혼녀.”
이 단어를 처음 들었을 때,
마음 한가운데가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마치 유죄 판결이 난 것처럼.
아이를 데리고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나는 어느 순간 “애 버리고 나간 여자”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나는 분명 알고 있다.
나는 애들을 한번도 버린 적이 없다는 걸.
나는 지금도, 앞으로도, 평생
내 아이들의 하나뿐인 엄마이다.
사람들은 결과만 본다.
아이 아빠와 살고 있는 아이들,
집을 나온 나.
이 장면만 떼어 놓고 보면
“그래도 애들은 데리고 나왔어야지”
“엄마가 애들을 두고 나가면 어떡해”
이런 말들이 너무 쉽게 붙는다.
그런데 아무도 묻지 않는다.
그 집에서, 그 공기 속에서, 그 말들 사이에서
내가 어떤 얼굴로, 어떤 눈빛으로,
어떤 숨을 쉬며 버텨 왔었는지를.
나는 어느 순간 알았다.
이 상태로 계속 살면,
먼저 무너지는 건 내가 아니라
내 옆에서 나를 바라보는 아이들일 거라는 걸.
사랑하는 소중한 엄마가
매일 눈치 보고, 평가받고,
깎아내려지는 모습을 보는 건
아이들에게 더없이 충격적인 ‘폭력적 환경’이다.
나는 아이를 위해 버텼다고 믿었지만
어쩌면 그 버팀이 아이들에게는
“어른이 되어도 이렇게 참고 살아야 하는구나”
라는 잘못된 교과서가 될 수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멈춰야 했다.
아이들을 버리지 않기 위해,
먼저 나를 그 자리에서 빼내야 했다.
사람들은 묻는다.
“그렇게 힘들었으면, 왜 애들을 데리고 나오지 않았어?”
나는 그 질문 앞에서 수없이 무너졌다.
하지만 다시 조용히 나에게 물어본다.
지금의 나 상태로,
감정도, 몸도, 돈도 다 너덜너덜한 이 상태로
아이 둘을 온전히 책임질 수 있었을까?
솔직하게 말하면,
나는 그럴 수 없었다.
그렇게까지 건강하지 않았다.
아이들을 데리고 나오는 것은
“위대한 결단”이 아니라
“현실적인 책임”이어야 한다.
감당하지 못할 책임을 지겠다고 덤볐다가
중간에 또 주저앉아 버리면,
그때 상처받는 건 결국 아이들이다.
그래서 나는 인정했다.
지금의 나는, 이 모든 걸 다 짊어질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이건 포기가 아니라,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책임지겠다는
매우 고통스러운 솔직함이었다.
나는 애들을 버린 게 아니라,
무너지지 않는 엄마가 되기 위해
잠시 한 발 물러선 것이다.
아이들 옆에 서 있을 수 있으려면
내가 먼저 온전한 사람으로 서 있어야 한다.
매일 감정이 롤러코스터처럼 요동치고,
불안과 공황에 휩쓸려 살아가는 엄마보다는
조금 떨어져 있더라도
천천히 회복해서,
단단한 얼굴로 다시 아이를 바라볼 수 있는 엄마가
아이들에게 더 안전하다.
나는 지금, 아이 없는 삶을 선택한 게 아니다.
아이들 앞에서 쓰러지지 않기 위한 삶을 선택한 것이다.
언젠가 아이들이 물을 수도 있다.
“엄마, 왜 우리랑 안 살았어?”
그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엄마가 그때는 너무 많이 상해 있어서,
너희를 제대로 안아줄 자신이 없었어.
그래서 먼저 엄마를 고치려고 했어.
그래야 너희를 더 오래, 제대로 사랑해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비양육 이혼이라는 말은
마치 판결문처럼 나를 붙잡으려고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나는 애들을 버린 여자가 아니라,
무너지지 않기 위해 잠시 뒤로 물러난 엄마다.
아이들 곁에 언젠가 다시 단단하게 서기 위해
먼저 나를 지키고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이 선택이
누군가의 입에서 뭐라고 불리든,
나는 나에게 이렇게 말해주려 한다.
“나는 애들을 버린 게 아니다.
나는 나와 아이들을 함께 지키기 위한
가장 아픈 선택을 한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