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가을, 겨울, 봄의 루이지애나 현대미술관
5월초의 덴마크,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현대미술관’이라 불리우는 루이지애나 현대미술관(Louisiana Museum Of Modern Art)에 가고 있다. 작년 여름부터 시작된 여행 속에 이번이 일곱 번째이지만 루이지애나는 언제나 나를 설레게 해주었고 또, 결코 실망시키지 않았다. 그런 만큼 지금의 발걸음도 가볍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오랫동안 다니던 회사를 퇴사하며 시작한 여행에서 만난 루이지애나는 지금 돌이켜봐서도 언제나 나에게 최고의 장소였다.
덴마크를 처음 여행하게 되었을 때, 하루 오전에는 햄릿의 배경이 된 크론보르(Kronborg) 성과 루이지애나 현대미술관(Louisiana Museum Of Modern Art)을, 그리고 오후에는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작가 카렌 브릭센의 생가를 방문하려 계획한 적이 있었다. 하루의 일정이 빡빡했기에 크론보르 성을 부지런히 돌아본 후 바로 루이지애나 현대미술관으로 향했다. 미술관이 있는 훔레백 역에 도착하여 ‘루이지애나’라고 쓰여있는 간판을 따라 걸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미술관을 가는 길은 가정집들만 있는 주택가였다. 가는 길이 조금 궁금해져 한참을 걷다가 맞은 편에서 오는 젊은 아가씨에게 가는 길을 물어보았다. 그 아가씨는 친절하게 ‘저기 모퉁이만 돌면 바로 루이지애나를 발견할꺼야.’라고 이야기해 주었고, 그녀의 말을 믿고 모퉁이를 돌아보니 아주 작은 문에 루이지애나 현대미술관이라는 간판이 있었다. 간단히 표를 산 후 들어간 미술관. 이상하게도 작품이 있는 미술관 실내보다 통유리로 된 창문 너머 밖에 사람들이 많았다. 나도 궁금하여 간단히 미술관을 돌아본 후 사람들이 있는 밖으로 나갔다.
잔디로 된 언덕, 어린이들은 마음껏 뒹구르고 어른들은 누워서 책을 보고 있었고, 그 너머로 펼쳐진 바다가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언덕 끝 계단에서는 사람들이 앉아 하염없이 바닷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나도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았다. 옆에는 두 모녀가 계단 제일 위 칸에 자리를 펴고 누워있었고, 앞에는 할머니들도 계단에 앉아 나처럼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느낌이 마치 천국과 같았다. 이렇게 여유있고 좋은 기분은 처음 느껴본 것 같다. 힐링이 제대로 되고 있었다. 여기는 간단히 돌아보고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저자 카렌 브릭센의 집에 가야되는데… 그녀는 다음 기회에 만나봐야겠다. 오후의 일정을 모두 미루고 이곳에 있기로 했다.
북유럽의 여름은 밤 늦은 시간까지 해가 떠있기 때문에 이 곳에서 최대한 보내야겠다고 다짐한 후 다시 일어나서 미술관 구석구석을 보고 언덕에서 바닷가를 하염없이 바라보기를 반복했다. 미술관은 채광이 잘되는 통 유리로 되어있으면서도 곳곳이 미로와 같이 뒤죽박죽이고 미술관 실내와 실외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는 작품들이 나를 놀라게 해주었다. 미술관 자체를 보느라 자세히 보지는 않았지만 루시안 프로이드(Lucian Freud), 자코메티(Alberto Giacometti), 쿠사마 야요이(Kusama Yayoi) 등과 같은 거장들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관람을 더욱 재미있게 만들어 주는 것은 호숫가와 그 앞 미끄럼틀, 양 옆으로 펼쳐진 통유리, 건물 내외부를 이어주는 징검다리, 층을 이어주는 나선형 계단, 미로와 같은 실내구조였고, 그 하나하나가 모여 호기심을 자아냈다.
이제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었다. 미술관을 나오는 발걸음 속에 아쉬움이 가득했기에 다시 매표소로 향했고, 연간회원카드가 얼마인지 보았다. 한국 돈 5만원정도(4번 방문하면 원금을 회수할 정도의 금액) 였고 나는 간단한, 정말 간단한, 서류작업 후에 연간회원카드를 만들었다. 그 회원카드를 만들어주신 핀란드인 관리자가 물었다. “한국은 먼 나라이고 너는 한국사람인데, 이걸 만들만한 가치가 있을까?”, 나는 속으로 ‘그러는 당신은 핀란드 사람인데, 여기 덴마크의 시골에 있는 미술관에서 일하고 있을 가치가 있을까?!’라 생각하면서도, “글쎄요. 앞으로 그 이유를 발견하게 되겠죠.”라고 답하고 나왔다.
장기간 여행을 하면서 북유럽과 북극권, 독일, 프랑스, 영국, 오스트리아, 체코, 스위스를 돌아본 후 다시 찾은 덴마크 코펜하겐. 연간회원권을 끊었으니 이제 다시 루이지애나에 인사를 해야할 시간이었다. 익숙해진 매표소에서 연간회권카드를 카드리더기에 긁었다. 직원들이 신기하게 여기는 것을 애써 무시하고 서둘러서 패스, 간단히 미술관을 돌아보았다. 역시 지난 번 여름과는 다른 작품들이 있었지만 나의 관심사는 역시 멍 때리는 언덕이었기에 다시 문밖으로 나갔다.
아니나 다를까. 여름과 마찬가지로 이 미술관에 온 사람들은 모두 언덕에 모여있었다. 어떤이는 점심 뷔페 접시를 가지고 계단으로 나와 식사를 하고 있었고, 어떤이들은 옹기종기 모여 커피를 마시고 있었고, 어떤이들은 와인잔과 와인을 가져와 바다를 바라보며 마시고 있었다. 아이들은 역시 언덕을 구르고 있었고, 아이들의 아버지는 그 장면을 놓칠세라 사진으로 담아내고 있었다. 이 곳에선 낙엽도 미술관과 함께 작품이 되어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 작품 속에서 아이들이 뒹굴고 뛰놀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때로는 미술작품에 타기도 하고 구르기도 하지만 그렇게 그들은 어려서부터 예술작품과 친해지는 것 같다. 재미있는 것은 사진을 찍으면 그 안에는 항상 어린이들이 있다는 것이다. 덴마크의 분위기가 안데르센의 동화속 아기자기한 마을의 느낌을 주는 것처럼 루이지애나도 어린이, 어른 모두에게 동심을 찾아준다.
눈이 내리고 바람이 거세게 불었던 겨울날, 루이지애나를 다시 찾았다. 오늘도 역시 미술작품을 간단히 본 후 언덕에 나가 보았다. 나의 목적은 항상 언덕과 바닷가였다. 눈이 내린 겨울날이었기에 언덕과 계단에 사람은 없었으며, 그저 사람들의 발자국만이 이 곳을 지키고 있었다. 나는 호기심이 생겨 바닷가로 나갔다. 세상에서 가장 바람이 많은 나라 중 하나이기에 풍력발전이 발달한 덴마크의 거센 바닷바람을 맞으며 바닷가를 따라 걸었다. 그리고 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계단을 오르며 목각으로 된 노인의 전신상을 발견하였다. 이마에 주름, 쳐진 눈매, 양손으로 쥐고 있는 삽, 발 아래에 뱀의 형상을 보며 그가 상당히 고단해 보였다. ‘어린이들의 천국이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현대미술관’의 끝에 이렇게 고생한 목각 할아버지가 서 있다니… 우리를 위해 고생하신 아버지의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이제까지 평생 우리를 부양하기 위해, 먹여 살리기 위해 그렇게 열심히 일하셨는데… “아버지 천국에서 편히 쉬세요.”
며칠 뒤 날씨는 다시 따뜻해졌고 나는 루이지애나를 다시 찾았다. 날씨는 언제 폭풍이 몰아쳤냐는 듯 맑았고, 바닷가는 마치 핑크빛 실크를 깔아놓은 듯이 잔잔했다. 그 모습이 몽환적인 기분을 자아냈다. 저 실크 빛 바다 끝에서 아버지가 기다리고 계신다. 하지만 나는 아직 이 땅에서 할 일이 많기에 다음을 기약해야 한다.
한 해가 지나고 봄이 되어 다시 찾은 루이지애나. 나는 지금 일곱 번째 그곳을 방문했다. 이제 나무들에 다시 싹이 돋기 시작했다. 미술관을 걷다가 곳곳에서 발견하는 넓고 넓은 잔디밭, 채광이 잘되는 통유리로 된 건물구조, 미로와 같이 지칠만하면 나타나는 또 다른 길과 또 다른 방, 수풀이 우거진 호수와 미끄럼틀, 사람들로 하여금 구르고 눕고 싶게 만드는 잔디 언덕, 그리고 하염없이 멍 때리도록 만드는 바닷가는 이 곳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현대미술관’으로 만들어 주었다.
피카소(Pablo Picasso), 자코메티(Alberto Giacometti), 쿠사마 야요이(Kusama Yayoi) 등 현대미술의 거장들의 작품들이 많지만 이 곳에 오는 사람들은 작품을 보러오는 것이 아니다. 이 곳에 눕고, 구르고, 뛰어놀고… 이 곳을 느끼기 위해 온다. 그리고, 그것이 진정 아름다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