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에서 기차를 타고 약 40분을 갔을까 나는 바다가 앞에 보이는 외딴 어느 마을에서 하차했다. 역 이름은 헬싱괴르(Helsingør). 햄릿의 무대가 된 크론보그 성(Kronborg)이 있는 곳이다. 기차에서 내리자 평화롭게만 보이는 작은 마을이 나를 반겨주었고, 햄릿의 성이라고 쓰여진 화살표를 따라가자 해안 건너편으로 요새와 같아 보이는 궁전인 크론보르 성이 나타났다. 크로보르 성이 있는 외레순해협(øresund)은 덴마크의 셸란섬과 스웨덴의 스코네반도 사이에 있기에 덴마크에게는 전략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였으며, 한때 해협을 장악했던 덴마크는 이 곳을 지나는 선박에 통행세를 부과했었다고 한다. 때문에 과거 여러 나라와 잦은 분쟁이 있었던 곳이기도 했다. 전략적 요충지여서인지 외곽을 따라 세워진 성벽과 같은 몇 개의 문을 통과한 후에야 성내에 도착할 수 있었다.
아마 햄릿을 읽어보지 않은 사람조차도 이 대사는 한번쯤 들어보았을 것이다. 영국이 낳은 세계 최고의 극작가인 셰익스피어에 의해 유명해진 햄릿. 하지만, 셰익스피어가 희곡으로 만들기 이전 이미 덴마크에서는 왕자 암레스(Amleth)에 관한 설화가 있었고, 그 설화를 바탕으로 한 연극이 유럽에서 연기되어졌다. 햄릿은 그것을 정통 희곡으로 정리한 것이다. 주인공인 덴마크의 왕자 햄릿(Hamlet)은 설화 속 왕자 암레스(Amleth)에서 마지막 ‘H’자를 제일 앞에 붙인 것이고, 햄릿의 무대가 되는 엘시노어(Elsinore)는 크론보르 성이 있는 헬싱괴르(Helsingør)의 영문 표기라고 하는 데, 크론보르 성의 한쪽 벽면에 셰익스피어의 조각이 있었고, 이 설화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 새겨져 있었다. 어찌되었든 이 설화는 영국의 극작가 덕분에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문학작품으로 재탄생되었고, 작은 마을 헬싱괴르는 크론보르 성을 보기 위해 해마다 수천수만의 관광객들이 찾는 세계적인 명소가 되었으니 덴마크로서는 감사할 일일 것이다.
간단히 성 내부를 둘러보았다. 내부 각 방은 침실, 연회장, 집무실 등 그 용도에 맞게 전시되어 있으며, 햄릿에 관한 설명과 물건들이 함께 전시되어 있었다. 해협을 지나는 배들을 잘 관찰해야 하기 때문인지 모든 방은 창문이 크고 채광이 잘되었는데, 이상하게도 몇 개의 방은 어둡게 막혀 있어서 관심을 끌었다. 가장 화려했던 방이기도 한 그 방들엔 벽면을 따라 사방으로 찬란해보이는 태피스트리가 전시되어 있었고 그에 대한 이야기들도 잘 설명되어 있어서 하나의 박물관과 같았다. 모든방을 둘러보면 햄릿의 이야기가 떠오르게 되고 그에 맞게 최적으로 꾸며졌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셰익스피어가 햄릿을 만들기 전 이 곳 크론보르 성에 방문했다는 것은 확인되어지지 않는다. 간단히 왕의 숙소와 집무실, 귀빈실 등의 관람을 마치고 성의 다른 쪽 면을 보기 위해 성 중앙에 있는 안뜰로 향했다.
성의 중앙 안뜰은 사각형 모양이고 성이 안뜰을 둘러싸고 있는데, 한쪽 편에는 역대 햄릿을 연기한 사람들에 관한 사진들이 설명과 함께 전시 되어있었고, 또 다른 한쪽 편에는 어린이들을 위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어린이들을 위한 공간에는 인형들과 함께 작은 방 안에서 어린이들이그 곳을 체험할 수 있게 전시되어 있었는데, 이러한 공간은 후에 방문한 덴마크 국립박물관이나 루이지애나 현대미술관에도 잘 갖추어져 있었다. 어린이들을 위한 체험 공간을 보면서 우리나라는 항상 객관적인 사실 복원에 제일의 초점을 맞추고 역사와 예술을 딱딱한 어른의 관점에서만 바라보도록 전시하였는데, 반면 덴마크에선 어린이들을 위한 공간을 만듦으로써 아이들이 역사와 예술을 어려서부터 쉽게 가까워질 수 있도록 한 모습이 인상적이라 생각되었다. 동화 속 마을과 같이 아기자기한 덴마크 곳곳에 이렇게 어린이들을 배려한 곳들이 많이 있기에 안데르센의 동화와 같은 작품이 나온 것이라는 생각이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제 또 다른 한쪽 벽을 채우고 있는 예배당으로 향했다. 크론보르성의 기원은 1420년대에 이 곳을 다스리던 왕이 외레순해협을 막아 요새를 세우고 지나가는 선박에게 통행세를 부과했던 것부터 시작한다. 이후 1574년부터 프레데릭 2세가 르네상스 풍의 왕궁을 짓기 시작하여 1585년 완공되었고, 1629년의 화재, 1658년 스웨덴의 침공 등 역사의 여러 수난을 겪은 후 1924년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고 하는데, 하나님의 가호 덕분인지 예배당은 1629년 화재가 있었을 때에도 훼손되지 않고 그대로 보존된 몇 안되는 곳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나무로 조각되어 형형색색으로 입혀진 예배당 내부의 모습이 상당히 화려하고 고풍스러움을 자아냈다. 이제 예배당을 다시 나와 성안 지하로 향하였다.
지하에서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햄릿의 이야기보다는 덜 유명하지만 나의 관심을 더욱 사로잡은 또 다른 이야기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전설적인 바이킹의 명장이자 오지에르(Ogier)라고 불리는 홀거 단스케(Holger Danske)이다. 안데르센 동화 속의 홀거 단스케는 크론보르 성 지하에 꿈을 꾸며 잠들어 있다. 꿈 속에서 홀거 단스케는 덴마크의 모든 일들을 지켜보고 있으며 덴마크가 위기의 순간에 처하면 잠에서 깨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그가 가진 힘과 용기로 덴마크를 지켜준다. 안데르센의 이야기에서 홀거단스케는 덴마크의 문장 속의 사자들, 하트들과 함께 덴마크의 국민적인 영웅들을 상징한다. 그리고, 국가적 위기의 순간이 되면 시민 한사람 한사람이 홀거 단스케가 되어서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헌신의 메시지를 어린이들만이 아닌 어른들에게도 일깨워 주는 것이다. 이렇게 헌신적인 이야기들을 어릴 적부터 듣고 자랐다니 왠지 덴마크의 정치청렴도가 세계 1위인 이유를 알 것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디 평화가 계속되어 홀거 단스케가 일어나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며, 다시 성 앞마당으로 나와 주변을 돌아보았다.
성 앞마당에 나오니 자랑스런 덴마크의 국기는 높이 걸려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고, 옆으로 대포들이 바다를 향하고 있었다. 수백 년 전 이 대포들은 이 곳을 지나는 배들을 향해 불을 뿜었을 것이다. 성을 따라 산책로가 깔끔하게 마련되어 있어 한 바퀴 돌아보았다. 소풍을 나온 아버지와 꼬마 아들이 해자에 앉아 거위들과 놀고 있었고, 외레순해협 앞에선 중년의 남성 두 사람이 낚시를 즐기고 있었다. 한때, 군사요충지였기에 잦은 전투와 분쟁이 있었던 크론보르 성이지만 지금의 모습은 평화롭기만해보인다. 외레순해협의 제일 가까운 폭이 4km정도라고 하는데, 그 바다만 건너가면 바로 스웨덴이다.
이 곳에서의 모든 일정을 마치며, 다시 코펜하겐 행 기차를 타기 전 헬싱괴르 시내를 돌아보았다. 알록달록한 집들과 하늘을 찌를 듯 높아 보이는 성당의 첨탑, 평화로워 보이는 덴마크의 골목을 걷다보면 동화와 같은 상상력이 사람들의 머리 속에서 빛을 발할 것 같다. 그리고 나에게 든 생각,
크론보르 성이 햄릿 이야기의 기원이 되었다는 것, 안데르센 동화 속 홀거 단스케의 보호, 어린이들을 위한 공간 등은 동화 속 마을과 같은 덴마크 곳곳의 모습과 함께 어른들을 동심의 세계로 이끈다. 안데르센의 이야기가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고 반면 나는 지금 어른이 되었지만 어린이와 같은 동심을 믿게 된다. 아니, 믿고 싶어 진다. 그 터전에서 발전해 온 행복지수 1위, 정치청렴도 1위, 어린이를 생각하는 마음을 중요시하는 덴마크가 아기자기한 선진국이라는 순수한 모습을 앞으로도 잘 유지하기를 조심스럽게 응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