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프레이케스톨렌 절벽을 다녀와 지금 시간 밤 12시였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호텔에 들어가려하니 모든 불이 꺼져있었고 문 앞에는 ‘오늘 호텔이 정전이므로 수리가 완료될 때가지 당분간 옆의 호텔로 옮겨달라.’는 문구가 적혀있었다. 옆에 있는 호텔은 지금보다 더 고급호텔이었다. 다만, 불이 꺼진 호텔에 들어가 짐을 꺼내 와야 하는 것이 문제였다. 오늘 6시간동안 등산하고 돌아와 반드시 씻어야 되는데, 북유럽 대부분의 호텔은 비누와 세면도구를 제공하지 않았고 속옷도 필요했다. 호텔 문을 열자 완전한 어두움이 눈앞을 가렸다. 지구 반대편 노르웨이 스타방게르까지 와서 호텔이 정전되는 경험까지 해볼 줄은 몰랐다.
두려움.
나는 오늘 낮 해발 600미터가 넘는 프레이케스톨렌 절벽 끝에 앉았다. 노르웨이 친구들과 산을 오르며 정상에 다다르면 나는 겁이 많기 때문에 절벽 끝에 앉을 일은 없을 것이라고 장담 했었는데, 막상 정상에 오르니 아무생각 없이 절벽 끝으로 갔고 그냥 다리를 내리고 앉았다. 해발 600미터 아래로 뤼세피오르드와 강이 펼쳐졌다. 두렵다는 생각도 없이 무의식적으로 앉아 사진도 찍도 그 풍경을 즐겼던 것이다. 두려움을 극복했던 하루였는데, 어두움에 당도한 지금, 나는 세상에 무서운 것보다 더 두려운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어둠속에서 오는 불확실성이었다. 어두운 복도 끝에 무엇이 있을지도 모른다. 계단으로 올라가는 문을 열면 무엇이 있을지도 모른다. 어두운 복도를 지나 2층의 내방 문을 열면 문 반대편에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확실한 두려움. 어두움에 대한 두려움과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의 중간 어딘가에 내가 서 있는데, 오늘에서야 확실히 불확실성에서 오는 위기의식은 비단 기업만 가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체감했다. 전직 대기업 인사팀 과장의 틀에 박힌 농담인가?
한 숨을 들이쉬고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1층 계단으로 통하는 문을 여니 한사람정도 지나갈 수 있는 폭의, 벽이 막혀있는 나선형 계단이 나왔다. 삐그덕 삐그덕. 바닥에선 내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휴대폰의 랜턴기능을 누르고 2층의 복도로 통하는 문 앞에 다다랐다.
공포영화에서 등장하는 집이나 건물에서 가장 무서운 곳은 어딜까? 화장실? 복도? 부엌? 갑자기 대학교 때 들었던 교양수업이 생각났다. 그것은 바로 문이다. 문을 열면 반대편에서 무엇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불확실성 때문이다. 두려움을 잠재우고 얌전히 2층 복도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그리고 복도 끝에 있는 방으로 한걸음 한걸음 발을 옮겼다.
다시 삐그덕 삐그덕. 복도 끝 어둠속에서 누군가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면 그는 나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복도가 오늘따라 길어보였다. 어제 체크인할 때 복도 가장 끝 코너 사이로 바다가 보이는 방을 달라고 한 나 자신이 원망스러워졌다. 호텔 전체가 조용했고 단하나의 걸음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면 나를 제외한 모든 손님들은 어두워지기 전에 이미 짐을 옮긴 것 같다. 슬며시 걸으며 방 문 앞에 다다랐다. 조심히 열쇠를 가지고 방문을 열었다.
아늑해 보이는 내 방으로 달빛이 비췄는데, 이렇게 반가울 수가? 방문을 걸어 잠그고 가방을 싸기 시작했다. 휴대폰의 랜턴을 켜고 방 안쪽의 어두운 화장실에서 세면도구들을 꺼냈다. 그 때 나타난 거울. 간 떨어질 뻔했다. 내 모습에... 확실히 거울 안에 있는 사람은 나인데, 확실한 내 모습인데도 무섭다. 보통 공포영화에선 거울에 비친 내 모습 뒤로 누군가가 서있기 마련인데... 거울이 문보다 더 무섭다. 조용히 눈을 깔고 세면도구들을 쌌다. 그리고 다시 문을 열어 어두운 복도로 나갔다.
지금부터 약 15년 전 군대에서 행정반 당번을 설 때였다. 새벽 2시에서 4시 사이에 당일 당번장교와 부대를 한 바퀴 돌아야 했다. 나는 스케줄을 짜는 선임과 사이가 좋지 않아 항상 성격이 좋지 못한 장교와 당직을 섰다. 새벽 두시 부대를 한 바퀴 돌아야할 시간 그 분은 주무신다. 나는 홀로 나와 부대를 한 바퀴 돈다. 언덕 중턱에 있는 중문, 그리고 십 여분 산 속을 헤치면 다다르는 대공초소, 정상을 따라 산을 반 바퀴 돌면 나타나는 절, 다시 내려와 수색대를 거쳐 정문에 이르면 경비소대 녀석들에게 부대 밖에 있는 교회를 다녀오겠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내가 10분 내에 돌아오지 않으면 신고하라고 메시지를 남긴다. 한 바퀴를 돌면서 가장 무서운 곳이 두 곳인데, 대공초소를 올라가는 산속 숲길도 아니요. 대공초소에서 절로 내려가는 산길도 아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무서운 곳은 가장 안도감을 주어야 될 종교 시설이었다. 절은 산 중턱에 있었는데, 당번병이 절을 한 바퀴 돌고 서명을 하도록 일부러 절에서 가장 뒤편에 있는 보일러실 안에 서명 종이를 담아놓는 나무상자가 있었다. 겨울에는 보일러가 돌아가기 때문에 보일러실에선 요란한 소리도 들렸다. 딱 영화 속에서 좀비가 튀어나오기 좋은 위치였다. 교회는 건물 밖 가장 뒤편 야산과 맞닿은 으슥한 곳에 나무상자가 걸려있다. 뱀 나오기 딱 좋은 위치이다. 그나마 교회가 조금 더 괜찮은 것은 내가 비명을 지르면 정문 초소에 있는 경비병들이 달려올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 두 곳은 내부 점검도 하지 않고 종이에 서명만하고 랜턴 불을 끈 후 부리나케 달린다. 절에는 불상도 있어서 상당히 무섭다. 다른 당직 장교들은 함께 다녀준다는데, 내가 주로 모신 녀석은 처음 딱 한번만 함께 돌고 그 이후로는 대부분 나 혼자 돌았던 것 같다. 나를 믿어서인지는 모르지만 이럴 때는 좀 덜 믿어줬으면 하는 생각이 가득하다. 맙소사 지금 여기는 지구 반대편 북유럽인데 15년 전 우울했던 그때의 생각이 나다니...
이제까지 2/3 성공을 거두었다. 다시 어두움을 뚫고 1층까지 내려가면 된다. 방문을 잠그자 아무생각 없던 것 같다. 아까 전 조용히 걷던 나도, 삐그덕 거리던 소리도 없었다. 처벅처벅처벅. 휴대폰 랜턴을 켜고 캐리어를 들고 마치 뒤에서 좀비가 따라오는 듯 부리나케 달렸다. 나선형 계단으로 통하는 문을 열고 캐리어를 밀어 넣고 계단을 불로 비추며 두세 칸씩 달려 내려왔다. 그리고 1층 복도 문을 부리나케 박차고 호텔 밖으로 나왔다. 성공. 처음에는 한걸음 한걸음 조심스럽게 움직였는데, 막바지에 다다를수록 더 긴장하고 조급해지고 무대포로 행하는 것 같다. 다른 것을 할 때에도 이러한 성격이 나타나려나? 뭔가 기분이 좋지 않다. 끝으로 갈수록 차분해지는 것, 돌다리도 두드리고 주변 상황을 완전히 파악하고 움직이는 것이 원래 내 전문이었는데 지금은 구를 듯 말 듯 달리다니. 마치 무슨 일을 할 때 중반까지 마친후 끝으로 갈수록 뭔가 우당탕탕탕 대충 마무리 짓는 느낌이 만연했다. 과연 나만 이럴까? 일할 때는 안 그랬는데...
5월의 스타방게르 새벽 1시. 하늘이 어둡긴 했지만 완전히 캄캄하진 않았다. 나는 유유히 캐리어를 끌고 옆 호텔로 향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여유로운 웃음으로 리셉션 데스크에서 방 키를 받았다. 새로 받은 방은 방금 나온 방 보다 두 배 정도는 넓었고 고급스러웠다. 짐을 풀고 욕조에 물을 받아 들어갔다. 이제까지 긴장감은 언제 그랬냐는 듯 나른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곯아떨어졌다. 망각이라는 것은 축복이다. 단, 정중하게... 불은 켜고 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