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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인기 May 17. 2020

커리어 하이

내가 회사에 첫 입사를 했던 시기인 2000년대 중반 일반적인 취업준비생들은 직장을 선택하는 요인 중 돈, 네임밸류(자부심), 비전(원하는 직무) 등과 같이 전통적인 가치를 우선시하였다. 개성이 강하다는 요즘 세대들은 Work & Life Balance(일과 삶의 균형, 이하 워라밸)나 장소(부산에 사는 교육생조차도 서울에서의 근무를 희망) 등과 같은 요인들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직장의 가치는 직업을 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전반적인 선호 사항으로 평가되어진다.      


삼성전자 본사 인사팀 인재개발센터에서 근무했던 시절은 직장의 전통적인 가치 중 돈과 네임밸류의 정점에 있을 때였다. 입문교육을 담당할 때,      


“인재와 기술을 바탕으로 최고의 제품과 서비스를 창출하여 인류사회에 공헌한다.”     

 

는 경영이념 아래 새로 들어오는 신입사원들에게 푸른 피를 수혈하였다. 1년 동안 삼성전자에 입사하는 4년제 대졸 신입사원은 약 7,500명, 경력입사자는 약 2,000명 정도나 되었다.(경력입사자를 매월 180명씩 꼬박꼬박 받아 교육) 보통 대기업에서 년간 500명 채용하면 많이 뽑는 것인데, 대졸 신입만 7,500명이라는 점은 대한민국을 넘어서 세계 어느 기업에서도 이룰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최고의 절정기를 이루었던 시절 신입사원 입문교육을 총괄했던 세 명의 담당자는 더이상 회사에 있지 않다.    

  



나의 사수 

나의 사수는 태평로 본관 시절 신입사원 입문교육을 담당했던 선배이다. 관리의 삼성 끝판왕으로서 인사와 재무가 삼성전자 전체를 총괄하였던 권위적인 본사의 입문교육 담당자였다. 2000년 중반 삼성전자는 보르도 TV로 세계 시장 1위의 성과를 거두었고 애니콜(스마트폰 이전의 휴대폰)은 1위인 노키아를 근소하게 추격하는 fast follower였다.(모토로라와 함께 근소한 격차로 추격)      


휴대폰이 스마트폰으로 바뀌면서 노키아는 하락했다.(지금 취업준비생들에게 노키아를 물어보면 이름 정도는 들어본 미국 또는 유럽의 어느 회사라고 답변. 노키아는 원래 핀란드 회사) 신흥 강자인 애플이 시장을 선도했다. 이 무렵 새로운 가치를 위하여 신입사원 입문교육은 자연스레 나에게로 인계되었다.      


향후 나의 사수는 마케팅으로 자리를 옮긴 뒤 과장 3년차 즈음에 회사를 그만두고 가족 사업을 물려받아 잘 운영하고 있다. 기업교육과는 전혀 다른 업무를 하고있는 것이다.      



삼성전자가 세트부문(Consumers Electronics)의 도약을 이룬 시기에 입문교육을 물려받았다. 학창시절부터 기업교육(격조 높게 인재개발)에 대해 관심이 많았고 운이 좋게도 같이 인사양성교육을 받은 동기들 중 인재개발부서를 희망하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기에 인재개발센터에 배치 받았다.(교육부서는 인사에서 가장 힘이 없는 부서)     


회사를 나올 때까지 회사의 경영이념과 핵심가치를 암기하는 교육 담당자는 내가 유일했었다. 아마 전사 유일이었을 듯하다. 회사의 비전이 곧 나의 비전이었고 회사의 철학이 곧 나의 철학이었다.      


그 정도로 입문교육은 내 삶에 있어서 가장 큰 부분 중 하나를 차지하고 있었다. TV는 세계시장 1위를 하고있는 상황에서 2위 업체와의 격차(No 초격차)를 벌리려 하였고 휴대폰은 스마트폰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였기 때문에, 전통적인 기업문화에 새로운 가치를 덧입히기 위해 창조경영을 교육하였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회사를 나와 약 1년 8개월간의 여행, 그리고 지금은 중소기업 인사시스템 구축과 취업 준비생/대학생들을 위한 강의를 하며 지내고 있다. 돈과 네임밸류가 직업의 절대적 가치라고 한다면 나는 예전보다 많이 어려운 삶을 살고 있겠지만 시간과 공간을 자기 주도적으로 사용할 수 있어 다채로운 시도를 해볼 수 있는 점은 상당히 큰 장점이라 생각한다.      


물론, 시간과 공간을 자기 주도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의미는 자영업자에게는 주말과 평일의 구분없이 일한다는 것을 나타내기도 한다. 다행히도 회사에서 빡시게 훈련받은 덕분에 아직까지 교육 평가에서 만점이 아닌 만족도를 받아본 적이 없다.      



나의 부사수

가장 다이나믹한 교육 담당자였다. 나의 사수와 내가 운영체계와 시스템을 잘 만들고 매뉴얼 화하여 교육생들을 훈련하는데 능숙하였다면, 나의 부사수는 톡톡 튀는 아이디어로 입문교육을 창의적으로 한 단계 더 도약시켰다.      


나의 부사수는 입사 처음 여성 이공계 신입사원으로 회사에 들어왔지만 신입사원 T/F 당시 발표회에서 두각을 나타내어 인재개발센터로 배치받았다. 기획력이 뛰어나고 새로운 시도를 많이 하였지만 본사 인사팀의 다소 딱딱하고 형식적인 보고문화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후배였다.      


이 친구가 신입사원 입문교육을 담당하기 시작하였을 때 삼성전자는 TV와 스마트폰 시장에서 세계 1위의 성과를 거두었다. 창의적인 교육이 요구되어질 때 맞추어 센스 넘치는 신입사원이 입문교육을 담당한 것이었다.      

물론, 이 친구도 지금은 회사에 없다. 대리 3년차에 회사를 그만둔 후 파리로 디자인 공부를 하러 떠났으니 보고와 문서, 형식과 위계가 잡혀있는 인사팀 문화와 얼마나 안 맞는지, 그리고 형식에서 벗어난 창의적 아이디어와 끼가 많은지를 간접적으로 볼 수 있다.      


지금은 공중파 3사가 출자한 스타트업에서 기쁘게 일하고 있다. 예전에 비해 버는 돈은 다소 적지만 회사가 망하지 않는 한 그 회사를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우리 셋 모두 인정한다.

팔자에도 없는 삼성전자 본사 인사팀에서, 그것도 홀로 신입사원 입문교육을 총괄했던 경험은 우리 인생의 최고점이었을 것이라고. 앞으로 다시 그러한 위치로 올라갈 일은 없을 것이라고. 어쩌면 처음부터 너무 높은 곳에서 회사생활을 시작했던 것 같다.   

   

단지, 돈과 자부심, 회사의 네임밸류가 직업의 목적이라면 누군가는 우리 셋이 빛바랜 영광의 거울을 가지고 과거를 계속 들여다볼 것이라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쉽게도 우리 셋은 회사를 나온 것에 대한 후회가 전혀 없다. 각자가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이 원하는 일을, 적어도 자신이 즐거워하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나의 선배는 보다 높고 숭고한 비전이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꿈은 회사를 나와야 실현될 수 있었던 것 같았다. 반면 나의 부사수의 경우 특별한 비전과 꿈이 있다기보다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마음껏 자유롭게 발휘할 수 있는 것에서 기쁨을 느꼈던 것 같다. 지금의 방송관련 일을 하고있는 것이 바로 딱 맞는 직업인 것이다.      


반면 나는 혼자서 일하는 것에 겁이 났던 것인지 아니면 능력이 없는 것인지, 워낙 성향이 조직 친화적이기 때문에 회사라는 곳과도 잘 어울렸다. 그저 무난하게 회사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것이 회사에서 하던 업무와 회사 밖에서의 업무가 크게 차이는 없는 이유이다. 하지만 자기 주도적으로 시간과 공간을 활용할 수 있는 점은 감사하게 생각한다.      


어찌 되었건 훌륭한 직장에서 적어도 10년 전후로 근무했던 것이 우리를 야생에서의 프로로 만들어 준 것은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누군가에게는 숭고하고 높은 목표를 따라, 누군가에게는 그저 자신에게 재미있는 일을 따라 실행하는 것이겠지만 각자의 선택 가운데 성취의 꽃이 개화하여 열매 맺길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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