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의 영향력이 아직 사그라지지 않은 어느 날, 방을 정리한다. 이제는 집합교육의 수요가 줄어들고 온라인 강의가 늘어나면서 방 정리가 교육생들에 대한 예의라는 생각으로 시작했다. 방 한쪽 편에 쌓여있는 박스들을 개봉하니 오래된 워크맨, 카세트테이프, 플로피 디스크, CD 플레이어가 눈에 들어왔다. 그 아래 MD(Mini Disc)와 필름 카메라가, 다른 한쪽에는 Kodak 필름들이 먼지가 쌓인 채 손길을 기다린다.
이 물건들을 박스에 담은 2,000년도가 벌써 20년이나 지났다. 그때 카세트테이프는 점점 저물어가고 CD가 제일 활황이었다. 몇몇 사람들은 소리바다와 같은 P2P 사이트를 통해 MP3 파일을 무료로 다운로드하기 시작했고 반면 나와 같은 사람은 광케이블을 CD 플레이어와 MD 플레이어에 연결하여 CD 음원을 MD로 녹음하였다. 나는 MD가 MP3를 누르고 세상을 평정할 것이라 착각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유치하지만 또, 그때엔 그것이 나름 진지했었던 고민이었다.
다시 고개를 돌려 책장을 정리한다. 제일 위 칸에는 고등학교 교과서가 있었는데, 그중 정치·경제 교과서를 꺼내어 읽어보았다. 빨간색, 파란색 줄들이 잔뜩 처져있다. 그때에는 그렇게 어려웠던 책들이 이제는 너무나 쉽게 이해가 된다.
‘그동안 머리가 커진 것이겠지.’
이미 25년이 지난 책들이다. 시대가 지나면서 학생에게 요구되는 역량도 달라지고 알아야 될 기본 소양도 달라졌겠지? 어쩌면 지금 보고 있는 교과서 중 몇몇 과목은 없어졌을지도 모른다.
다시 박스에서 필름 카메라를 꺼내어 본다. 함께 있는 필름들의 유통기한은 이미 지난 상태였다. 그 옆에 쌓여있는 비디오테이프를 하나씩 틀어본다. 아직까지 비디오 플레이어를 버리지 않길 다행이다. 모든 것이 디지털화된 지금의 DVD나 비디오 파일로 보는 것처럼 칼같이 선명하고 깨끗하지는 않지만 무엇인가 따스함이 느껴진다.
내 개인적으로 감사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날로그 시대와 디지털 시대 모두에 발을 담갔다는 것이다. 비디오테이프부터 DVD/비디오 파일까지, 필름 카메라에서 디지털카메라까지, 삐삐라고 불리는 무선호출기부터 핸드폰/PCS를 거쳐 스마트폰까지, 전축/카세트 플레이어/CD 플레이어/MD 플레이어/MP3 플레이어까지 기기의 변화뿐만 아니라 문화적 흐름이 바뀌는 것을 체험해 보았다.
이제는 모든 것이 디지털화된 세상. 보고서를 수기로 작성하던 시절 일주일 동안 처리하던 일을 지금은 두세 시간이면 완료한다. 모르는 정보나 궁금한 사항이 있다면 스마트폰을 검색하여 바로바로 해소한다. 동영상을 통하여 배우는 것이 책 보다 빠르고 정확하다. 산재해 있는 문제들을 정리하고 핵심을 파악하여 해결하는 것이 중요한 능력이 되면서 미니멀리즘도 더불어 유행하기 시작한다. 재미있는 사실은 업무를 빠르게 처리하고 정보를 습득하는 것이 수월하게 세상은 변했지만 인간의 삶은 변함없이 항상 바쁘다는 것이다.
책장 한쪽에 쌓여 먼지가 수북한 앨범을 꺼내 펼쳐보았다. 빛 번짐에 조금은 올드하지만 디지털기기로는 만들어질 수 없는 색감이 느껴진다. 굳이 느낄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아직은 이것들을 지니고 싶어 졌다. 버리려고 모아 놓았던 박스를 다시 방 한쪽 구석에 두었다.
선택과 집중, 무엇보다 속도가 중요한 이 시대에 오만 잡다한 것?! 들을 가지고 조금은 더 느리게 즐기며 사는 것도 썩 좋은 생각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