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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인기 Oct 05. 2016

내 삶에 남겨진 자그마한 책임

9월 10일 밤 10시 30분 미국 뉴웍(Newark)공항에 도착하였다. 시카고에서 한번 경유해서 오는 것이었기 때문에 직항보다 비행시간이 조금더 길어서 피곤했지만 밖에서 기다리고 계실 이모, 이모부를 생각하며 부지런히 짐을 찾았다. 


모든 짐을 카트에 싣고 입국장을 빠져 나온다. 짐을 찾는 곳부터 입국장을 빠져나가는 길이 길고 내리막으로 되어 있었다. 문과 벽은 투명한 통 유리로 되어있기 때문에 창 밖으로 이모가 보였다. 내리막길로 카트를 밀고 내려가는 도중 기타를 떨어뜨렸다. 그와 동시에 나머지 짐들도 와장창 떨어졌다. 통 유리 밖에 있는외국사람들이 ‘하하하하’ 비웃는다. 이모도 웃는다. 하지만 미국을 처음 가보는 길이었기에 모든 것이아름다웠다. 


뉴저지 주 파라무스(Paramus)에 있는 이모 집에 가는 동안 오른편으로뉴욕이 눈에 들어왔다. 맨하탄(Manhattan) 야경의 스카이라인을 바라보며, 쌍둥이 빌딩도 보이고 모든 것이 새로웠다. 오랜시간 비행을 하여 배가 고파 이모 집에 가는 동안 한인타운에서 갈비탕을 시켜먹고 집에 도착하여 바로 잤다. 


다음날 아침 잠에서 깨어나 보니 이모부는 이미 출근을 하신 상태였다. 미국에서처음 맞아보는 상쾌한 아침이 너무나 기분 좋았다. ‘American Dream~!!!’의 미국을 오다니…..


출근을 하는 이모부한테서 전화가 왔다. 출근길이 너무 막히는 데, 뭐가 좀 이상하다고….. 뉴욕방향 Route #4가 평소에 막히는 것도 아닌데, 막혀도 너무 막힌다고 하는 것이었다. 길이 너무 막히기 때문에 이모부는 무슨 일이 일어난 것 같다며, TV를틀어보라고 하셨다. 그리고, 우리는 TV를 틀어서 뉴스를 보았다. 



 

사실, 이 글에 앞서 여러분께 알려드리지 않았던 것이 있다. 

미국 이모 집으로 첫 어학연수를 출발하는 인천공항에서


내가 도착한 날은 2001년 9월 10일 밤 10시 30분이었던 것이다.   


11일 아침 이모부의 전화에 TV를 틀었고, 뉴욕은 아비규환이 되어 있었다. 어젯밤 차를 타고 오면서 보았던 쌍둥이 빌딩이 무너져 내린 것이었다. 어젯밤에 도착한 나로서는 너무나도 충격적인 일이었다. 비행기들은 일제히 회항하거나 인근 다른 공항으로 착륙했고 뉴웍(Newark) 공항의 한국 노선은 폐쇄되었다. 불과 10시간 정도만 늦게 출발했으면, ‘내가 그 비행기에 타고 있었을 수도 있었다’, 또는 적어도 ‘단 몇 시간만 늦게 탔었어도 내 비행기는 회항하여 다른 공항에 내렸을 수도 있었다.’ 옆에서 이모가 적잖이 위로를 해주었다.    

     

이렇게 9/11은 나에게 찾아왔다.


그로부터 몇 일 뒤 맨하탄에 갔다. 그라운드 제로(Ground Zero)는 폐쇄되었고 반경 몇 km까지 철조망이 쳐져 있었다. 시멘트 먼지는 이후 몇 개월이 지나도록 없어지지 않았다. 그만큼 무너져 내린 것의 규모를 생각할 수 있었다. 철조망 밖에서는 가족, 친지, 친구…또는 아무 사람들이 철조망에 카드를 붙이고, 꽃을 꽂으며 안 쪽을 향하여 눈물을 흘린다. 건물 잔해와 시멘트 먼지, 이러한 행렬은 몇 개월이 지나도 계속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그 때  성공적인 어학연수와 미션 프로그램을 마치고 다음해에 귀국하였다. 




2012년 겨울 나는 미국을 다시 찾았다. 10년만이었다. 그라운드 제로는 911 메모리얼(Memorial)과 One WorldTrade Center(2009년 이전 The Freedom Tower로 명칭) 건설에 한창이었고 당시에는 완성 전 단계였기 때문에 반드시 예약이 필요했던 911 메모리얼 방문을 사촌동생의 예약 덕분에 할 수 있었다. 

911 메모리얼에는 당시 모든 희생자들과 소방관 등의 모든 이름들이 기재되어 있었다. 당시 건물이 무너지고 난 이후, 사람들을구하기 위해 저층의 남은 건물 계단 위로 올라간 소방관 대원들 또한 나머지 건물의 연이은 붕괴 속에 목숨을 잃었다. 그들은 사람을 구하러 올라가는 도중에 죽음을 당한 것이다. 그들을 위한 기념비도 세워져 국가, 국민을 위해 헌신한 사람들을 기억한다. 다행히 미국은 경찰, 소방관, 군인 등 국가를 위해 헌신하는 공무원에 대한 명예를 지켜주며 처우가 좋다. 

이 기념비에 겨울비가 내린다. 애석하게도 그것은 나의 눈물은 아닌 것 같다. 그 상황이 발생 했을 때, 맨하탄 거리를 걸으며 몇 개월이 지나도 쌓인 흙먼지 바람과 시멘트 가루들, 철조망 밖에서 주저앉아 흐느끼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 상황이 너무나도 생생했고 가슴 아팠지만 지금은 잊혀진 것 같다. 나는 그렇게 냉정해진 것 같다. 회사 일이 힘들고 살아가는 것이 바쁘기 때문이란 핑계는 답이 되지 않는다. 나는 이 일을 저지른 사람들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그저 나 지극히 나 자신에게 포커스를 두고 싶다.     


내가 탄 비행기가 로컬로 경유하는 비행기였기 때문에 그 때 몇 시간만 늦게 왔어도, 다른 비행기로 갈아탔었다면 나도 그렇게 될 수 있었다. 그 일이 있은 즉시 후에는 ‘나의 삶은 그때 그라운드 제로에 묻힐 뻔했어. 그런데, 기적적으로 살아난 거야. 그러므로 앞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도우면서 살아야 해. 조금의 시간도 허비하지 않고 허투루 살면 안돼!’라고 다짐했지만 그것도 잠시~ 그 이후에는 그런 생각들도 무뎌지고 더 이상은 그러한 짐을 짊어지고 싶지 않게 생각 속에서 잊혀졌다.     


또한, 그 때부터 마음 한편에 있던 물음이 있다. 나는 과연 그들이 아닌 내가 산 것에 대하여 감사하는 것이 맞는 것인가? “다행이다?!” ….. 그러한 감사함은 그라운드 제로에 묻힌 사람들에 대한 죄책감이 남는다. 아직도 너무 헷갈린다.

가운데 가장 높은 빌딩이 완성된 One World Trade Center 이다.

그 때 난 죽을 수도 있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살아야겠다고 다짐하였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러한 삶을 살고 있지 않다. 성공과 야망을 바라며, 직장에서 술 한잔 속에 기쁨과 슬픔을 느끼며 살아왔다. 그저 그렇게 살고 있다. 옳은 것은 해야겠다고 생각하지만 그만큼 쉽지 않다. 뉴욕을 자주 가는 편이어서 이제는 완성된 One World Trade Center를 바라보지만 더 이상 아무런 느낌이 없다.   


오늘도 나는 또 하나의 갈등을 짊어지고 살아간다.     




어느 날 내 마음 속에 한줄기 긍정적인 생각의 빛이 내린다. ‘내 삶에 사랑이 없다는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나는 그 때 일을 잊고 냉정하게 살아왔지만 조금씩 조금씩 변하겠다 다짐한다. 지금은 미약하지만 주위사람에게 사랑을 실천하며 한걸음 한걸음 나아갈 것이다. 주위의 작은 것부터 실천하며 살아간다면 그것이 쌓이고 쌓인 이 길의 끝에서 나는 다른 사람의 슬픔에 함께 슬퍼하며 그들의 눈물을 닦아줄 성숙한 사람이 되어있을 것이다. 비록 부족하지만 지금부터 작은 한걸음을 내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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