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락 너희랑 안 먹을 거야. 부르지 말아 줘.”
나는 신부님이 꿈이었다. 도시락 꼬박 챙겨 다니던 고등학교 2학년 시절, 점심시간에 성당 친구들은 끼리끼리 모여 밥을 먹었다. 우린 서로 학년과 반이 달라 운동장 관중석에 모여 앉아 먹었다. 하루는 3학년 선배 안재현 예비신학생이 찾아와 말했다.
“우리 신학교 가려면 외롭고 쓸쓸해야 해. 우리 둘만이라도 각자 먹자.”
형은 내 우상이었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형도 먼저 신학교에 들어간 나봉균 학사님께 듣고 실천하고 있다며 언짢게 생각 말라고 했다. 각오는 되어 있었다. 어차피 부모님 반대와 친구들을 뒤로하고 선택한 길이었다. 다만, 이 좋은 충고를 나 혼자 따를 수는 없었다. 학교 마치고 같은 아파트 사는 1학년 강대원 예비신학생을 불러냈다.
“할 얘기 있어, 아파트 경로당 정자나무로 와.”
다 얘기했다. 사실 친구는 나보다 대원이가 훨씬 많았다. 전달을 핑계로 평소 마음에 들지 않던 까불까불한 태도까지 문제 삼아 보태어 타일렀다.
“너 누구랑 밥 먹냐?”
“거봐 이럴 줄 알았어. 너 지금처럼 살면 신학교 못 가. 어쩌려고 그러냐.”
괜한 소릴 했다. 강대원 신부님, 현재 천주교 교구청 홍보부에서 힘쓰신다.
친구 곽영신은 원장 수녀님이다. 영신이는 수녀원에 들어가기 전 우리 집에 들렀다. 우린 서로 사진을 주고받았다. ‘메주고리에 성모님’ 상본을 같이 주며 지갑에 넣어 꼭 간직하라고 했다. 열차 운전할 때 성모님께서 지켜주신다는 친구 얘기에 막연히 지니고 다녔다. 한동안 아내는 수녀님과 내 관계를 의아하게 여겼다. 나도 수녀님이라 방심했다. 결혼하고 영신이 사진은 지갑에서 뺏어야 했다. 수녀님은 강화도 ‘순교자의 모후 전교 수녀회’에 계신다. 분단의 땅에 갈등을 없애고 평화가 찾아오시길 기도하신다.
친구 조규석 예비신학생과 나를 담당했던 수녀님이 계셨다. 우리는 공 막델레나 수녀님을 ‘엄마 수녀님’이라 불렀다. 규석이와 나는 한참 오락실을 들락거렸는데 “너네 좋아하는 게임 나도 하고 싶다”라며 오락실을 찾은 왈가닥 속 깊은 수녀님이다. 나는 고등학생 때까지 줄곧 ‘예비신학생’으로 불렸다. 하지만 그해 수능을 망쳤고 신학교를 포기했다. ‘엄마 수녀님’과 신자들 볼 낯이 없어 무턱대고 도망쳤다. 조규석 신부님 첫 미사를 가만히 찾아가 묘한 감정을 느꼈다. 이루고 싶다면 공부해야 했다. 마음 다잡고 돌아간 성당에서 청년회, 주일학교 교사를 시작했다. 여자를 만났고 미련은 사라졌다. 애 셋을 낳자 창피함 마저 날아갔다. 20년이 흘러 아내와 수녀님이 계신 수도회를 찾았다. 용기를 냈다. 못 알아보면 어쩌지. 뭐라고 하지.
“비오야! 왔구나.”
단번에 알아보셨다. 수녀님은 아내 손을 꼭 잡고 말씀하셨다.
“내가 비오 엄마라네.”
나는 고(故) 장영식 도마 신부님을 보고 자랐다. 권위적이지 않고 친구 같은 도마 신부님을 닮기 위해 노력 중이다. 나도 구태의연하지 않은 좋은 어른으로 남을 수 있을까. 한때는 내 기도를 외면했다고 생각했다. 생각은 나를 옭아매었다. 스스로 괴롭히고 혼자 힘들어했다. 묵묵히 가면 됐는데 그러지 못했다. 무너졌다고 생각한 인생은 계속되었다. 첫째가 태어났고 도마 신부님과 같은 세례명을 지어주었다. 나 하나로 충분하지 않으셔서 아이 셋을 보내신 건 아닐까. 기차는 풍경을 싣고 달린다. 흐린 날씨 탓 않는다. 내가 신학교에 가지 못한 거 보면 모르겠나. 그분 다 계획이 있으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