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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이노 Feb 12. 2020

짬통에 빠진 날

"나 여자 친구 생겼어! 보고 싶으면 지금 올 것!"


서른세 살 나는 퇴근길 친구 문자를 받고 차(SUV 렉스턴)를 돌렸다.  

친구의 여자 친구를 보기 위해.


장소는 대전 궁동.
궁동은 충남대학교를 중심으로 형성된 화려한 도시다.  

반면에 번성한 도시를 가득 메운 인파로 주차 공간이 매우 부족한 곳이기도 하다.    
  
도착해서 동네를 서너 바퀴 돌며 주차할 곳을 찾고 있었다.
마침 서있는 차들 사이로 비어있는 한 곳이 눈에 들어왔다.
잽싸게 주차를 하고 나니 눈앞에 작은 팻말 하나가 보였다.


"쓰레기 수거 지역"

"쓰레기 수거차에 방해될 시 견인 조치함!"


어렵게 찾은 자리를 지나칠 수 없었다.

'그래도 최대한 공간을 확보해 줘야겠다'라는 생각을 했다.  
후진기어를 넣고 조심스레 후진.


그때였다.

"꽝! 꽝! 꽝!"

우렁찬 소리 세 번.

소리가 어찌나 크던지 나는 누가 내차 뒤에서 총을 쏘는 줄 알았다.

'이게 무슨 소리지?'
사이드 미러를 보는 순간 몸은 떨리고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차 옆으로 흘러나오는 수많은 국물들...
'뭐지?'
아. 내가 건드렸다.
음식물 수거통 흔히 짬통이라고도 하는 그것.

나는 짬통 세 개를 차례로 들이받아 엎었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괜히 왔다'

'내 여자 친구도 아니고 봐서 뭐한다고 왜 여기까지 왔을까'

후회했지만 소용없다.

엎질러진 짬통이다.

 
세 개의 통들은 도미노 현상으로 나란히 쓰러져 누워있었다.  
'왜 이렇게 면발들이 많은 거지?'   
'아, 옆에 중국집이 있구나'
그 집 매상을 자랑하듯 쏟아진 짬뽕 국물과 면발.

지나가는 학생들은 코를 막고 수군거렸다.

지금 저 여학생이 친구와 귓속말로 무슨 말을 하는지 물리적으로 들리지 않아야 했음에도

다 들리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차 안에서 내 몸은 얼어붙어 바보가 되었고 창피해서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몇 분의 정적이 흐르고 나는 어떻게든 빨리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 도망치자!"
비겁하지만 도망치기로 마음을 먹었다.
재빠르게 전진 기어를 넣고 차를 앞으로 움직였다.
그때였다.
"달~ 당~ 달~ 당~"  
"무슨 소리지?"
차에 내려 뒤를 보는 순간 기절할 뻔했다.  
짬통이 차에 박혀 따라오고 있었다.

짬통에 국물과 면발들은 거리에 기찻길을 수놓았다.  

짬통이 도미노 현상이 일어날 때 SUV 차량 아래 스페어타이어 밑으로 부딪혀 밀려 들어갔다.
짬통은 스페어타이어와 정확히 맞물려 있었다.
맨손으로 짬통을 잡았다.

빨리 빼내고 이 순간을 모면하고 싶은 생각뿐 이였다.  
'더럽다는 생각?'

전혀 없었다.

하지만 어찌나 깊이 박혔는지 정말 죽어도 안 빠졌다.
주차선을 나온 내차는 1차선 도로를 막고 있었다.  

앞뒤로 차들이 줄을 지어 서 있었다.
길을 비켜달라며 서로 빵빵댄다.


비켜주기 위해 다시 차에 올라탔다.
후진기어 넣고 원래 있던 자리로 되돌아가야 했다.
또 "당~ 달~ 당~ 달~" 소리가 들렸다.
주차를 다시 하고 차에서 내렸다.  
아뿔싸!
후진을 하자 조금 전에 간신히 매달려 있던 짬통이 더 깊숙이 박혀 버렸다.
그 사이 지나가던 학생들은 두 배로 늘어났다.  
아예 자리를 잡고 구경하는 이들도 생겼다.  
나는 황급히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큰일 났어. 빨리 와서 나 좀 도와줘. 제발"

"왜 무슨 일이야?"

"쓰레기가 꼈어!! 지금 국물 때문에 미칠 거 같아"

"뭐?"

"아. 죽겠네! 빨리 와봐!"


다행히 친구들은 잽싸게 나와주었다.  

어이없는 상황을 확인한 친구들은 나에게 욕을 한 바가지 먹였다.  
투덜대는 친구들이 차 뒤에서 짬통을 붙잡기로 했고

나는 운전석에 앉아서 앞으로 차를 조금씩 이동했다.  
짬통을 빼내고 다들 실성한 사람처럼 웃고 있을 때
요리 학원에 다니던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다 사람 먹는 거다. 빨리 치우고 가자!"  


녀석. 다르긴 달랐다.

음식을 대하는 태도가.


우리는 중국집, 분식집 사장님께 사정을 설명하고 청소 도구를 빌렸다.

또 편의점에서 생수를 사서 길에 부어가며 청소를 마무리했다.

우리는 그렇게 국물과 면발들을 빠짐없이 제자리로 돌려보냈다.


아, 친구의 여자 친구를 만났다.

보자마자 우리에게 처음 건넨 말을 잊지 못한다.


"다들 육개장 먹고 오셨나 봐요."


십 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제수씨를 만나면 친구와 이때 얘기를 한다.

냄새가 추억이라는 향기가 되었다.  

오래도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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