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자 전성시대, 글쟁이의 미래에 대해.
최근 누군가와 한 대화입니다. 주제는 제가 그분께 '엔젤투자'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엔젤투자자라는게 다 삼촌한테 받는 거 아니에요? 나는 집 담보 삼고.
나: 요즘은 그렇지 않습니다. 투자자들이 집 담보 이런 걸 오히려 말립니다. 엔젤투자만 전문으로 하는 투자자나 투자사도 적지 않습니다.
그: 그래도 사업은 있어야 투자를 받잖아요?
나: 엔젤투자는 사업계획서만 보고도 합니다.
그: 그걸 어떻게 믿고 해요?
나: 보통 사람이죠. 그 사람이 과거에 한 일이나 기술. 예를 들어 코딩을 기가막히게 잘한다든지.
그: 그럼 우리는 뭘 잘하죠?
나: .... 우리는....<은 는 이 가> 를 잘 맞춰서 쓰죠....
그: 그게 기술이 되요?
기자출신인 저는 글 쓰는게 8년여간 본업이었습니다. 천하미문은 아닙니다만 대충 누가봐도 이해할 수 있는 글을, 웬만한 사람보다는 빨리 쓸 수 있다고 자부합니다. 나름 '문장론' 책을 몇권이나 읽기도 했고, 노트에 기사들을 필사하며 좋은 문장을 연구하기도 했습니다. 신문사 사내벤처와 뉴미디어인 QUE를 거치면서 모바일 시대에 맞는 글쓰기를 고민하기도 했고요. 여튼 '글쓰기'라는 주제에 일반인보다 오래 천착했으니, 바보가 아닌 이상 어느 정도 쓸 줄 아는 것은 당연하겠죠.
아마 이건 개발자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어느 개발자가 8년간 코딩에 대해 연구하고 관련한 책을 보고 남의 코드를 필사까지 하며 연구했다면, 꽤 잘하겠죠. 문제는 각자가 투자한 시간 대비 어떤 가치를 얻고 있냐 입니다.
지금은 직방에 매각된 부동산 정보 앱 '호갱노노'의 심상민 대표를 만났을 때가 기억납니다. "뭘 믿고 창업했냐"고 물었더니 "나는 코딩을 잘한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네이버 출신이었습니다. "네이버에 개발자 수천명 있지 않느냐"고 했더니, "그 중에서 나만큼 하는 사람 별로 못봤다"라고 했습니다.
자 그러면 (실제론 그렇지 않지만) 만약 내가 신문사에서 "나보다 글 잘쓰는 사람 별로 못봤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나도 자신있게 창업을 해도 될까요. 대한민국 사람들의 99%는 쓸 줄 아는 글을, 좀 더 쉽게 잘 쓸 줄 안다고 해서 그게 하나의 기업을 만들 기초적 자질이 될까요.
쉽게 판단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을 때 가장 쉬운 방법은 '해외 사례'를 보는 거죠. 신문사 같은 것을 '미디어'라고 합니다. 기존 미디어를 혁신한 스타트업형 미디어 기업을 '뉴미디어'라고 하죠. 다음은 제가 공부한 뉴미디어 중 나름의 성공을 거둔 것들입니다. 이 기업들의 창업자나 대표들을 한번 정리해 봤습니다.
Huffington Post/Arianna Huffington/작가, 기자
VOX media/Jim Bankoff/IT경영인, 넷스케이프 창업자
nowthis/Kenneth Lerer 등/전 허핑턴포스트 대표. 미디어 경영자
blendle/Alexander Klopping/IT 블로거, 기자
QUARTZ/Kevin Delaney/기자
buzzfeed/Jonah Peretti/전 허핑턴포스트 공동창업자, 미디어경영자
the information/Jessica Lessin/기자
vice media/Shane Smith/기자
the skimm/Danielle Weisberg, Carly Zakin/방송 프로듀서
AXIOS/Jim VandeHei, Mike Allen /기자
mediapart / Edwy Plenel / 기자
보시다시피 기자나 언론인 수가 적지 않습니다. 아니, 다수입니다. 이들도 주특기가 저처럼 <은, 는, 이, 가> 였겠죠. 여튼 이들은 미디어를 만들었고, 크게는 수십억달러가 넘는 기업을 일궈냈습니다. 물론 복스나 버즈피드가 IT적인 면에서 더 혁신적인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나, QUARTZ같은 곳도 만만치 않습니다. 오히려 기술 위주로 콘텐츠를 풀어가던 digg.com같은 곳은 50만달러라는 헐값에 매각될 정도로 사실상 사업에 실패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위에 언급된 언론인들은 글쓰기 외에도 다양한 경험을 했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뿌리는 여전히 기자입니다. 결국 좀 과장해서 말하면 <은, 는, 이, 가> 전문가도 창업해서 큰 기업을 일굴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들의 전문성을 살려서요.
언론 시장은 작지 않습니다. 한국의 신문 시장만 발라내서 따로 봐도 2조원이 넘습니다. 방송 시장을 합하면 그 규모는 훨씬 커집니다. 충분히 혁신이 일어날만한 곳입니다.
그리고 사람은 누구나 뭘 읽습니다. 읽는데 사람들이 들이는 시간은 과거만큼은 아니어도 여전히 많습니다. 많은 비즈니스는 시간을 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금과 같은 소비자의 시간을 아껴주거나, 소비자가 투자할 만하게 해 주면 사업이 되겠죠.
'기자 짱짱맨'이라고 주장하는 건 아닙니다. 한국과 선진국의 언론 환경은 많이 다르죠. 그들의 시장, 소비자와 우리의 그것이 다르기도 하고요. 다만 <은, 는, 이, 가>도 꽤나 괜찮은 기술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의 질문을 다시 한번 곱씹으며 정리해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