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주, 당신이 모르는 진짜 쓰임새 ①

왜 사주를 다시 생각해야 하는가

by hardy

『사주, 당신이 모르는 진짜 쓰임새』 시리즈

① 왜 사주를 다시 생각해야 하는가

② 역의 구조, 그리고 사주의 본래 자리

③ 왜 사주는 혹세무민의 상징이 되었나

④ 사주는 삶의 수양을 위한 공부다



20대의 끝자락에서 나는 방황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이 터널을 언제까지 가야 하는 걸까? 어쩌면 이런 질문은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도 낯설지 않을 것이다. 의문은 답답함이 되었고 해소가 절실했다. 언제 끝나는지, 어디가 끝인지, 어떻게 되는지 궁금했다. 그렇게 내 발검음은 점집으로 향했고, 그곳에서도 나의 갈증은 해소되지 않았다.


불확실한 미래는 우리를 불안케 한다.


내 답답함을 가족도, 친구도, 의사도, 역술인도 그 누구도 해결해주지 못하는 상황에 환멸을 느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인연이 되어 시작한 마음공부로 인해 점차 안정을 찾았다. 나를 돌보고 다스릴 수 있는 것은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후에 앞선 원망과 환멸에 후회했다.


이때부터 사주의 원리에 대한 궁금증이 마음 한편에 자리했다. 내가 느꼈던 답답한 마음과 감정의 소용돌이가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궁금했다. 그 궁금증은 탐구로 이어져 천지인 삼수의 역(易)에 다다랐고, 그 체계의 확장성에 매료됐다. 하늘에 적용하면 천문, 땅에 적용하면 지리, 사람에 적용하면 인사가 되고 그 도구로써 사주로 이어지는 그 연결이 신비하면서도 합리적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나는 피할 수 없는 질문에 마주했다. "답을 주지 못했던 역술인. 도대체 사주는 무엇을 위한 것인가?” 오늘날 한국에서 사주는 흔히 점술, 무속, 기이한 믿음의 영역으로 취급된다. 미래를 정하고 길흉화복을 예언하는 도구라는 오해 속에 갇혀 있다. 하지만 내가 경험한 사주는 그것과는 결이 달랐다.


사주는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한 도구였다. 스스로의 기질, 경향, 한계와 가능성을 들여다보고, 자신이 가진 그릇을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동양의 고전적 방법론이었다. 우리는 과연 '자신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그리고 그 인식에 대한 무게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소크라테스가 말한 "너 자신을 알라", 봉우 권태훈 선생님의 "나에게서 구하라"와 같이 수행 철학으로써 그 본질에서 다르지 않았다. 나를 이해하고 삶을 어떻게 다듬어야 하는지 통찰을 얻는 일. 그것이 바로 사주가 지닌 본래의 가치였다.


그러나 오늘날의 사주는 상업화와 "무속" 이미지에 갇혀 본래의 의미를 잃어버렸다.

나는 잊혀진 사주의 본래 가치를 다시 꺼내고, 그것이 삶을 다듬는 도구가 될 수 있을지 이야기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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