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이 떠나는 것이 아쉬워 글을 끄적입니다. #3
이번 주 목요일은 수능이라고 한다.
이제는 딴 나라 얘기처럼 느껴지지만 11월 셋째 주가 되면 날씨가 좀 더 쌀쌀해지는 것 같고 수능을 봤던 그 날들이 문득문득 생각이 난다.
자랑이 아니다.
사실 나는 수능을 총 3번 봤다.
지금은 모르겠지만 내가 고등학교를 입학할 당시, 소위 뺑뺑이가 아닌 시험을 치고 고등학교에 들어갔다.
큰 노력 없이 나름 좋은 성적(전교 30등)으로 나는 제주 오현고등학교를 입학했고 17살 고세호는 이 정도 공부하면 SKY는 눈감고도 가는 줄 알았다.
그렇게 무난하게 성적이 떨어졌던 나는 고등학교 2학년이 되어도 축구 아니면 친구들과 급식 먹느라 바빴다.
그러다 고3을 올라가는 겨울방학.
SKY는 정말 하늘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고3이 되고 뒤늦게 수능 공부를 시작했다. 호랑이에게 쫓기는 사슴마냥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당시 성적은 반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들었던 것 같다. 사실 그 정도 하면 인 서울은 하는 줄 알았다.
(정말 당시 제주도는 정보가 1도 없었다.)
근데 내가 갈 수 있는 대학은 서울 안에 존재하지 않았다..
기초가 없었기에 당연히 나의 첫 수능은 처참했다.
수능 성적이 나오고 욕심 많았던 나는 자신 있게 서울 아니면 대학을 가지 않겠노라 선언했다.
"엄마! 서울에서는 재수가 필수래!"
엄마는 나 때문에 점을 치러갔고 재수를 하지 말라는 답을 듣고 왔다.
"점? 그런거 왜 믿어 걱정 마"
그때 멈췄어야 했을까...
나는 베프 한 명과 배낭 하나 들고 서울 양재동에 재수를 하러 떠났다.
2011년은 내 생에 가장 치열했던 1년이었다.
서울로 향하는 제주 공항. 고등학교 친구들이 나와있었고, 마치 전쟁터에 가는 군인처럼 친구들이 한 명씩 나를 안아주었다. 눈물을 찔끔찔끔 흘렸고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엄청 쪽팔리다.
어쨎든 학원 근처 약 1평 정도 되는 창문도 없는 고시원에서 새 둥지를 텄다.
정말 거짓말 안 하고 1년 동안 나의 패턴은
1. 아침 6시 기상
2. 영어 듣기 시작
3. 아침 식사 : 마트에서 무려 500원에 팔았던 오뚜기 3분 카레 (진짜 돈 아끼려고 이것만 먹었다.)
4. 등원 후 언어 영역 공부
5. 수업
6. 집에 가서 동네 한 바퀴 뛰고 다시 복습
7. 저녁 12시 취침
이렇게 1년을 살면 SKY는 그냥 들어갈 줄 알았다.
당시 정말 독하게 공부했다. 베프와 나는 미친놈 소리를 들으며 공부를 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무식한 공부법이었다. 요령은 1도 없었다.
가장 또라이같았던 짓은 '묵언수행'이었다.
선생님께 질문하는 시간이 아니면 학원에서 말을 안 했다. 자습을 하다가 옆 친구 연필이 떨어지면 조용히 연필만 건넸고, 반 친구가 매점 가자고 하면 팻말을 꺼냈다.
'죄송합니다. 묵언수행 중입니다.'
(진짜 왕따 안 시킨 반 친구들이 존경스럽다.)
하지만 성적은 생각만큼 오르지 않았다.
솔직히 너무 답답했고, 자존감이 무척 떨어졌다. 매주 모의고사 이후에는 눈물을 삼켰고, 뱉은 말이 있었기 때문에 애써 태연한 척했고 시샘이 많아졌고 그렇게 나는 점점 망가져갔다.
몸도 많이 상했다. 1년간 3분 카레를 먹었다. 그리고 스트레스가 많아 신경성 방광염에 걸렸다. 누가 뒤에 있으면 소변을 보지 못하고 물을 전혀 마시지 않아도 50분이 지나면 화장실을 가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 생활을 끝으로 수능 1주일 전, 제주도 고향집을 1년 만에 방문했다.
첫날, 엄마는 고생했다며 갈비찜을 해주셨다.
사실 나는 엄마 음식을 다 좋아하지만 갈비찜은 진짜 안 좋아한다.
근데 1년 만에 만난 엄마 밥이 너무 따뜻했다. 따뜻했던 흰밥과 갈비찜을 한 숟갈 먹고 엉엉 울었던 기억이 난다. 엄마와 아빠는 다 알고 계셨지만 왜 콧물을 흘리냐고 추워?라고 물으시며 뒤돌아 같이 우셨다.
진짜 시험 잘 쳐서 이분들에게 꼭 보답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시험을 또 망쳤다.
평소 자신 있던 수리 영역을 제외하고는 기대했던 만큼 성적이 나오지 않았다.
아버지는 내 성적을 듣고 '1년간 공부를 하긴 했냐?'는 말씀을 하셨다. 지금은 아버지와 아무 탈 없이 지내지만 한동안 아버지와 대화를 하지 않았다.
그래도 잘 봤던 수리 영역 덕에 광운대학교 전자공학과를 가게 되며 애매하지만 인 서울을 하였다.
1년간 꾸역꾸역 대학을 다니다 군대를 갔다.
그리고 열심히 군생활을 하다 티비에 나오는 광고를 보고 참 멋있다는 생각을 했다. (이때 멈췄어야 했어)
위에 적었듯이 내 전공은 전자공학과이다. 역시나 아무런 정보가 없고 무식했던 나는 광고를 하려면 광고홍보학과를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내 전역일은 2013년 11월 8일이었다. 당시 2014 수능일은 2013년 11월 8일이었다.
미신을 믿지 않았던 나는 강력한 미신에 이끌려 군생활 틈틈이 수능 공부를 시작했다.
군대 안에서 참 많이 욕을 먹었던 기억이 난다. 유난 떨지 마라. 그냥 현실을 인정해라. 등등
(물론 자기 일처럼 도와줬던 분들도 많았다.)
아침에 1시간 일찍 기상해서 공부를 했고, 중간중간 중대 독서실에 가서 공부를 했고, 점오 이후 다시 한 시간 정도 공부를 했다.
적은 월급으로 인강과 문제집을 구매했고 '마지막이다'라는 다짐을 하며 전역과 수능을 동시에 기다렸다.
정말 신기하게도 그렇게 안 오르던 성적이 오르기 시작했다.
6월, 9월 모의고사에서 국어 영역(갑자기 바뀌었다)을 제외하고 1,2등급을 맞았던 것 같다. 심지어 수학 영역은 난생처음 100점을 받았다.
그렇게 말년 휴가를 받고 제주도에 내려가 시험을 치렀다.
정말 많이 긴장했던 기억이 난다.
1교시 국어 영역 시간 : 전향력? 지금도 모르겠다. 어마 무시한 지문을 만나면서 멘탈이 나갔다. 정말 토나온다는 말을 몸소 체험했다. 국어영역을 끝나고 화장실로 달려가 토를 했다.
2교시 수학 영역 시간 : 자신 있는 수학 문제를 풀며 지쳤던 심신을 가라앉혔다. 모든 문제를 풀고 딱! 한 문제가 남았다. 아무리 풀어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땀이 나기 시작했지만 침착하게 1번부터 문항 비율을 세기 시작했고 딱 3번과 5번이 하나씩 비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10분을 3번? 5번? 이것만 고민하다 나왔다.
3교시 그리고 나머지 사회 영역 : 수학 영역에 3번 5번이 계속 신경 쓰였고 말이 안 되지만 영어 듣기 시간. 사물함에서 알람 소리가 울렸다. ㅅㅂ 개나쁜ㅅㄲ들. 눈 앞으로 사물함을 통째로 들고나가던 선생님들이 아직도 생각난다.
그렇게 나는 또 또 시험을 망쳤다.
집에 도착하고 하루 정도 슬펐다. 그러다 참 징글징글하게 살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정도 했는데 이러면 나랑 수능은 안 맞는 거야'라고 나를 다독였다. 그리고 수능은 정말 나쁜 시험이라는 생각도 했다.
결국 다시 전자공학도로 돌아갔고 남들에게 수능 공부를 했던 것을 숨기며 열심히 학과 공부를 했다. 그리고 현재 나는 광고 대행사에서 결국 일하고 있다.
나보다 많이 시험을 치른 사람도 있겠지만 수능은 정답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충분히 노력할 가치는 있는 시험이다.
하지만 딱 그 정도다.
본인이 할 수 있는 충분한 노력을 했다면 만족스러운 성적이 나오지 않아도 되는 시험이다.
이렇게 3번이나 수능을 말아먹은 나의 이야기는 이제 한 페이지로 정리가 된다.
죽을 것처럼 힘들었던 순간이 결국 한 페이지로 정리되어버렸고 가끔 술자리 안주가 되기도 한다.
내 자식 세대에도 수능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제 나에게 수능은 딱 이 정도인 것 같다.
이번주 수능을 치르시는 수험생들에게 '시험을 잘 쳤냐'는 물음보다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 많았다'라는 얘기를 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