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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ote Apr 15. 2019

수염의 이점

주말이 떠나는 것이 아쉬워 글을 끄적입니다. #8

나는 털보다. 고등학교 때부터 면도를 시작했으니 말 다했다.

주변 사람들은 이런 나를 늘 놀렸다. 야만적이다. 털이 왜 이렇게 많냐. 제모를 해라. 무턱대고 싫다고 하시는 분들도 있었다. 그래서 어린 시절 나는 털보인 나 자신이 너무 싫었다. 나에게 유전자를 물려준 아빠도 너무 미웠다. 


수염은 나의 커다란 콤플렉스였다.

하지만 지금, 

나는 누구보다 수염을 잘 써먹고 있다. 


수염을 기르기 시작한 것은 군대 전역 직후, 친구의 조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 친구는 지금도 내 스타일에 많은 영향을 주는데 어느 날 술을 마시다가 무조건 나는 수염을 길러야 한다고 말했다. 당시에는 수염을 기르는 사람이 드물어서 처음에는 싫다고 했지만 며칠 고민하다 에라 모르겠다. 그냥 길러버렸다.


그렇게 내 삶은 변하기 시작했다.

우선 '길거리 포교활동'으로부터 벗어났다. 

나는 한 달에 한 번씩 꼭 길을 걷다 '인상이 좋아 보이시네요~'라는 말을 들었다. 

수염을 기르고 난 후, 인상이 안 좋아졌는지 이제는 2년에 한 번꼴로 당한다. 

두 번째, 털보라고 놀리는 사람들 말에 더 이상 상처 받지 않게 되었다. 

예전에는 털 많은 나 자신을 부정했다. 하루에도 두 번씩 면도를 했고, 사진 찍히는 것을 극히 싫어했다. 그러나 털이 많은 걸 인정하고 기르기 시작한 후부터는 주변 사람들이 "털이 참 많다..."라고 하면 "그니깐요ㅎㅎ 그래서 그냥 기르고 있어요 ㅎㅎ" 라며 웃어 넘길 수 있었다. 

세 번째, 나만의 아이덴티티가 형성되었다.

나는 늘 존재감 제로였다. 처음 대학을 들어갔을 때, 나는 수 백 명 공대생 중 한 명이었다. 교수님은 내가 누군지 몰랐고, 수업을 같이 듣던 친구들은 내가 그 수업을 이수했는지 조차 몰랐다. 

그런데 수염을 기르기 시작하면서 내 존재감은 놀랍게도 올라가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였냐면, 당시 우리 학교에서 수염 기르는 사람은 (내가 알기론) 내가 유일했다. (도서관에서 밤새느라 면도를 하지 못했던 사람들 제외) 큰 강의실에 털보가 떡하니 앉아있으니 교수님은 나를 기억하기 시작했다. (단점은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리 과는 물론이며 다른 과 친구들과 팀플이라도 하면 '오 전자공학과 맞죠?'라며 알아보기 시작했다. 


한 번은 우리 학교에서 '게릴라 데이트'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했는데 무려 포미닛이 방문했다. 모든 학생들이 포미닛을 보러 우르르 달려 나갔다. 그냥 포기하고 도서관을 가려던 찰나. 담당 PD가 "거기 수염 많은 학생! 인터뷰 한 번만 해줘"라며 부탁을 해왔다. 덕분에 수많은 인파를 뒤로하고 포미닛과 얘기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티비 출연도 하게 되었다. (단점은 학교 엘리베이터 홍보 화면에 그 장면이 돌기 시작했다....) 


또한, 집 근처 카페를 두 세번 정도 가면 '또 오셨네요?'라는 인사말을 들었다. 그렇게 나에게도 단골 가게가 생기기 시작했다. 존재감이 제로여서 고민하던 나는 그렇게 변해갔다.

마지막으로 수염의 이점을 정리하면, 늘 자존감이 부족했던 나에게 자존감이 생겼다.

내가 하는 말을 사람들이 듣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내 말에 자신감이 생겼다. 그리고 내가 뱉은 말에 책임감도 생겼다. 

아 맞다. 그리고 수염덕에 쉐이빙제품 광고도 찍었고 돈도 벌었다.


나는 수염 덕에 컴플렉스 해결법을 터득했고,  수염이 없어도 나를 표현할 수 있는 여러가지를 발견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기.'

우연한 기회에 얻은 나의 수염은 이젠 보물같다.

아버지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며 이번 주 브런치를 마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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