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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대로 동행 Apr 26. 2022

꾸준함의 힘

                                 

아이들과 수업을 하다  보면 눈에 띄지 않지만 서서히 변화되는 모습을 발견하곤 한다.

그 중의 한 가지가 처음 왔을 때에는 한 두 줄의 글도 힘겨워 하면서 도저히 쓰지 못하고 끙끙대던 아이가 어느 날 묵묵히 자신만의 글을 비록 느리지만 꾸역꾸역 쓰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다.


 처음부터 술술 글을 잘 써 내려가는 아이들이 단박에 자신만의 글을 써서 뿌듯한 표정으로  내밀 때보다 그렇게 산고를 치르듯 끙끙거리며 자기의 글을 힘겹게 쓴 뒤 쑥스럽게 내미는 아이들의 글이  내게 더 신선한 기쁨을 주곤 한다.

물론 그 글은 아직 생각이 덜 여물거나 형식에 맞지 않는 등의 부족함이 느껴지지만 글을 잘 쓰는 친구들의 매끄러운 글보다 한결 더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다.

아마도 그 글 안에 무언 중에 스며든 그 아이의 수고와 땀이 느껴져서인지도 모른다.


어떻게 그 아이는 그렇게 눈에 띄게 약진할 수 있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본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그런 아이들은 대개가 작고 사소한 숙제도 열심히 해오는 아이들이다.

같은 독후감 숙제를 내주더라도 시간이 없어서, 아파서, 숙제가 많아서 등의 갖은 핑계를 대면서 안 해오거나 다음에 해오겠다는 아이들이 있는 반면 발전이 느껴지는 아이들은 비록 매끄럽고 화려한 글은 아닐지라도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어렵게 생각을 쥐어 짜낸 흔적이 느껴지는 글을 제시간에 맞춰 낸다. 그 글을 읽고 내가 이 글을 쓰는 데에 얼마나 걸렸냐 물어보면 아이는 쑥스럽게 2시간 혹은 3시간이 걸렸다고 대답한다.

그 순간 아이의 천진한 모습을 보며 나는 전율한다. 글자 수 1000자 분량의 글을 채우기 위해 힘겹게 책을 읽고 그 애가 보냈을 2-3시간의 그 지난하고 긴 사유와 쓰기의 과정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 시간을 버티면서 글을 쓰기까지 아이가 얼마나 숭고한 노력을 쏟아 부었을까? 그 아름다운 노력 앞에 일종의 경탄을 느낀다.


그런 아이들의 발전해 가는 모습은 내가 힘겹지만 이 독서논술 수업을 하는 원동력과 보람이 된다.      

반면에 올 때부터 글을 잘 쓰고 책을 제법 읽은 아이도 있다. 그러나 이 아이가 어느 새부턴가 안주하고 편안하게 글을 쓰는 모습이 보인다. 표현도 진부하고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늘 쓰던 글의 틀에 박혀서 비슷한 유형의 글을 쓸 때에는 혹 아이가 지친 건 아닌지 의구심도 품어본다. 그 아이의 수준을 믿고 나름 도전해 보라는 의미로 어려운 책을 건네주었는데 끝내 다 읽지 못하고 아이가 책에 대한 혹평만 늘어놓을 때는 당혹스럽기도 하다.

정말 내가 어려운 책을 내준 건지, 혹은 그 아이의 읽고자 하는 노력이 부족했던 건지 곰곰이 생각해 본다.


왜 그 도전을 선뜻 감당하지 못할까. 내가 너무 과대평가 한 건가 스스로에게 자문해 본다. 그러면서 결론은 아이들을 쉽게 판단하지 말자고 내린다. 왜냐하면 그 아이가 버텨내는 바쁜 일상, 하루의 무게를 내가 미처 다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아이는 그렇게라도 자기 합리화를 하면서 스스로를 지탱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꼭 내가 모든 상황을 자로 잰 듯 정확하게 판단해서 대처해야만 하는 피곤한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러면서 나는 묵묵히 지켜보기로 결정한다. 정 아이가 원하지 않으면 강요하지 않고 그 아이에게 맞는 쉬운 책을 권하면서 속도를 늦추자고 스스로에게 약속한다.


가장 잊지 못할 아이는 또래의 독해 수준이 안되어서 온 친구였다. 그 아이는 순전히 아는 지인이라는 이유로 가르치게 되었다. 처음에는 아이가 읽기 자체가 안되어서 수개월을 함께 읽기에만 집중하는 지루한 시간을 보냈다. 1시간여 책을 소리 내어 읽으며 때로는 아이도 지치고 나도 내심 지쳐갔다. 그러다가 아이가 천천히 스스로 읽는 법을 터득하게 되면서는 재미있는 책을 위주로 과제를 내주었다. 물론 아이는 숙제를 빈번하게 빼먹고 그런 아이를 적당히 봐주지 않고 나는 안 해 온 숙제를 함께 끈질기게 해 나갔다.

어떤 때 우리는 한 달 가까이 책 한 권을 갖고 읽으면서 씨름했다. 그러면서 아이는 서서히 굴복하기 시작했다. 차라리 책을 제 때 읽어 가는 게 모두에게 훨씬 편안한 일이라는 것을 스스로 체득한 것이다.


 그 후 재미있는 책으로 조금씩 흥미를 붙여주자 스스로 읽는 재미를 터득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1년여를 보낸 뒤 아이는 드디어 제 수준의 책을 즐겁게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제법 글쓰기도 요건에 맞추어서 잘 해낸다. 처음에는 영 말도 안 되는 글을 써서 한숨을 쉬곤 했지만 이제는 가끔 그 애가 쓰는 글을 빨리 읽고 싶어 기대된다.

 어린아이처럼 읽기부터 천천히 배워간 아이가 쓴 글은 언제나 나에게 신선한 충격과 생각의 여지를 남겨주기 때문이다.      


나는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독서논술 선생님이 되었다고 생각했지만 수업을 하면서 아이들의 각양각색 모습을 보면서 정작 내가 가장 많이 배우고 있음을 깨달았다. 아이들 각자의 모습을 보면서 아이들이 자라는 만큼 나도 함께 자란다. 어느덧, 우리는 함께 성장하는 동반자가 되어 있다. 치열하게 책 한 권을 읽고 그에 대한 자기 생각이나 책의 내용을 말하는 것은 물론, 매주 그 책을 도구로 해서 종류별로 글을 쓰고, 정기적으로 함께 자료를 분석하고 토론하는 수업이 분명 수월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매월 철학, 인문, 사회, 경제 등의 비문학 책을 읽고 각종 창작동화, 명작, 고전 등을 섭렵하면서, 이제는 이것이 정기적인 일상이 되어 꾸역꾸역 살아내고 있다.


매주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 모여 이렇게 치열한 분투를 마다하지 않고 함께 감당해 내는 아이들의 모습은 늘 멋있고 대견하다. 그 모습을 보면서 나 자신도 과연 아이들만큼 열정적으로, 성실하게 살고 있는가 반성해 본다. 우리는 어른이기 때문에 당연히 아이들보다 더 잘한다고 생각하지만 어른이라고 해서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아이들의 저 순진한 성실함, 꾸준함이야 말로 어른들의 모습을 돌아보게 하고 삶에 대한 영감을 주기 때문이다.


물론 말썽꾼도 있고, 수업시간에 조는 아이들도 있다. 나의 진을 쏙 빼놓는 그런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 한숨을 쉬며 대안을 마련하느라 부심한다. 그러나 어쩌랴. 어른들도 각양각색의 모습으로 살 듯 아이들 또한 그러한 것을...


나는 행복한 글 방지기인  이 일이 참 좋다. 이 일을 통해서 나의 견문과 열정도 깊어졌지만 아이들과 함께 호흡하고, 분투하고, 성장하면서 삶의 원동력을 얻는다.


우리가 지내온 시간들, 그 꾸준함의 힘을 믿는다. 읽기와 글쓰기는 항상 우리를 고통스럽게 한다. 써보지 않은 각종 생각의 근육들을 총망라해서 가동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과정은 각종 대중매체나 SNS 등에 익숙한 요즘 아이들에게는 다소 생경하고 어려운 경험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꾸준함으로 그 경험을 감당하는 아이들이 언젠가는 그 빛나는 결과를 볼 줄 믿는다.

한 가지에서 꾸준함의 힘을 경험한 아이들은 다른 분야에서도 수월하게 꾸준함의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언젠가 이 아이들이 세상의 옳고 그름에 대해 정당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고 나와 내 주변의 문제를 직시하고 함께 해결해 나가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줄 믿는다.


우리는 오늘도 그 꾸준함의 힘으로 버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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