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적으로 글을 쓰겠다고 결심한 이후 일상에 몇 가지 작은 변화들이 생겼다.
우선 글감을 찾아서 매일 주변을 열심히 관찰하고 작고 사소한 순간도 놓치지 않으려 오감을 예민하게 만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던지는 사소한 말 한 마디, 길을 가다 놓치기 싫은 정겨운 풍경들, 어느 순간 내 마음을 휘감는 감정의 폭풍우에 이르기까지...
예전에는 사소하게 여기고 무심히 넘어갔던 순간들 하나하나에 나의 반응이 예민해지고 그것을 어떻게 글로 쓸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되었다.
물론 그런 고민들은 대부분이 고민으로 끝나고 나는 다시 하루 일과에 지쳐서 노트북 앞에 앉아볼 엄두조차 내보지 못하고 잠자리에 들기 일쑤였다. 그러다 보니 정작 일 주일에 한 번 글을 쓰는 것도 소재고갈, 마땅한 글감이 없어서, 혹은 너무 피곤해서 간신히 채우곤 했지만 내가 일상에 대해 예민해진 건 글을 쓴 이후 생긴 주요한 변화이다.
두 번째로는 글을 쓰기로 한 이후 늘 내 머릿속을 언어의 조각들로 채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계속 혼자서 머릿 속으로 각종 언어, 단어, 표현들을 생각하면서 혼자서 감탄했다가 혹은 마땅한 표현이 없어 좌절했다가를 반복한다.
가끔은 그런 내 모습이 흡사 정신나간 사람의 모습 같아서 낯설 때도 있지만 이 또한 글을 쓰기로 결심한 이후 나타난 변화이다.
글을 쓰는 것은 책상 앞에서만 하는 작업이 아니라 평상시에 내가 생각했던 단어, 각종 언어들이 정작 노트북에 손댄 순간 내 머릿속에서 분출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 이후 나는 틈만 나면 내 머릿 속에서 적당한 표현들을 만드느라 끙끙대고 책이나 신문을 읽다가도 간직하고 싶은 표현들이 있는지 눈에 불을 키고 찾았다가 메모하곤 한다.
세 번째로는 글을 쓰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부터 정작 지금까지 마땅한 글을 쓰지 못했던 건 순전히 나의 열정과 노력이 부족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글은 생각보다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고도의 정신적 노동이다. 그렇기에 글을 쓴다는 것은 노트북 앞에서 절절매며 생각을 쥐어짜는 인고의 시간을 각오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것은 단순히 시간을 투자하는 차원을 넘어서 노력과 의지가 필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나는 요새 들어서 내가 정작 그런 시간을 투자할 의지가 없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만치 절박하거나 글을 사랑하거나 목표가 확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요새 글을 쓰는 것은 앞으로 나만의 책을 내고 싶은 하나의 목표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나는 여전히 글쓰기를 멀리한 채 일상에 매몰되어 살았을 것이다.
네 번째로는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의 글에 대해 관대해졌다.
예전에는 아이들의 글에서 부족한 것들을 찾느라 이잡듯이 글을 분석했으며, 수고롭게 글을 쓰고 뿌듯해 하던 아이들의 표정에 무심하게 첨삭과 비판을 던지곤 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이들에게 참으로 미안한 순간들이다. 조금 더 격려해주고, 잘했다고 칭찬해 줬더라면 우리가 함께 한 시간들이 훨씬 더 값지고 빛나지 않았을까? 아이들이 책과 글을 더 많이 사랑하게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많이 든다.
정작 내가 글을 써보니 그만한 시간 내에 그만한 생각을 짜서 글 한 편을 쓴다는 게 보통의 수고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들은 이미 훌륭한 작가 입문이 가능한 수준이다.
모두 자기만의 생각을 꼼꼼하고 야무지게 때로는 조금 어설프지만 그조차 사랑스럽게 풀어낼 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아이들의 글 속에 담긴 그 수고와 아름다움 보다는 틀린 맞춤법, 표현의 어색함, 생각의 빈곤 등을 찾아내서 비판하기에 급급했다. 나같이 게으른 선생님이 겁 없이 내뱉는 독설을 들으면서도 우리 아이들이 수긍하고 여기까지 따라와 줬다는 것만도 참으로 대견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매번 수업시간마다 나는 아이들의 글에 더 많은 인정과 격려, 칭찬을 넣어주려 애를 쓴다. 그러나 그런 칭찬이 어색한지 아이들은 때로는 입을 삐죽거리기도 해서 나를 당황시킨다.
그리고 나의 가차없는 비판에 도리어 얼굴이 시원해지는 표정을 보곤 한다.
아이들은 나보다 훨씬 겸손해서 이미 비판과 지적을 받을 준비가 항상 돼있다.
글을 쓰게 된 이후 나는 아이들로부터 훨씬 더 배울 점이 많다는 것을 매 시간 자각한다.
그래서 글쓰기를 시작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독서논술 선생님 일을 시작할 때는 그저 내 아이들을 제대로 교육시키고 싶다는 욕심만 앞섰다. 그러나 수업을 하면서 많은 책들을 읽고 생각을 나누고 글을 쓰면서 나도 나의 글을 쓰고 싶다는 욕구를 느꼈다.
한 1년간은 신입교사로 자리잡느라 정신없었고 3년차가 되니 서서히 그 욕구를 실현하고 싶어졌다. 그러면서 글쓰기를 시작하게 되었다. 막상 시작하고 보니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수업시간에는 아이들이 온힘을 다해 글을 쓰지만 나는 한 밤에 거실 한 켠 책상에서 노트북 불을 밝히며 글을 쓴다. 그러면서 나의 아이들이 느꼈을 그 산고와 창작의 희열을 맛본다. 그 순간들은 내가 아이들과 수업을 하는 시간 동안의 에너지가 되어 발산된다. 나는 전보다 더 아이들의 고민과 글이 풀리지 않는 답답함을 깊이 이해하게 되었고 한 편으로는 제대로 된 자기 글을 쓰면서 모처럼 뿌듯해 하는 행복감도 함께할 줄 알게 되었다.
그 과정을 통해 아이들의 글에 대해 관대해지고 그 작은 작가들의 작품을 더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나 때로는 내가 잘 가고 있는 것인지 회의에 잠기곤 한다. 과연 이렇게 공식화된 글 형식을 지키도록 하는 게 맞는 것인지, 공장에서 나온 것 같은 규격화된 글을 쓰라 하는 것, 책을 통해 늘 그렇듯이 기계적으로 생각을 뽑아내게 하는 게 맞는 것인지, 늘 고민에 잠긴다.
물론 나 자신도 아직 정답을 모르고 어떻게 나가야 할지 한참 길을 찾는 중이다.
그런 답답함 속에 나보다 20년 어린 이슬아 작가의 ‘부지런한 사랑’이라는 책을 찾아 읽었다.
그녀는 그저 글이 좋아 20대 초반부터 생계전선에서 뛰면서도 부지런히 자신의 글을 써왔고 지금도 아이들을 가르치는 글쓰기 선생님을 하고 있다. 매일 일간 이슬아라는 메일 계정을 만들어 자신의 글을 구독신청한 회원들에게 월 만원을 받고 글을 써서 배달했다고 한다.
그녀의 발상도 참신했지만 매일 글을 써서 보낸다는 생각 자체가 엄청난 부지런함, 열정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인데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어떻게 그런 바쁜 일과를 쪼개어 매일 새로운 글감으로 글을 쓸 에너지를 얻을 수 있을까?
분명한 건 그녀가 글을 향한 어마어마한 사랑과 열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나보다 20년이 어리지만 20년을 더 산 어른마냥 나는 그녀에게 배울게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작에 그토록 성실한 열정을 갖고 살지 못했던 나의 모습이 후회스럽기도 하다. 그녀가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쓴 에세이들은 하나같이 표현이 독창적이고 따뜻했다. 그녀만의 분명한 문체 색깔을 지닌 글들은 그간 그녀가 축적해 온 엄청난 독서와 사색의 내공을 고스란히 담고 었다. 그래서 나는 미치도록 그녀의 재능,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부지런한 사랑이 부러워졌다.
그녀의 말대로 글쓰기란 부지런한 사랑이다. 글쓰기는우리를 게으르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기에 나는 점점 글쓰기를 사랑하게 된다. 그냥 시간이 가는대로 떠다니지 않도록 글쓰기가 나를 붙들어 주기 때문이다. 자꾸만 나를 향해서 생각하라고, 느껴보라고, 그리고 그 순간을 온전히 잡으라고, 그래서 마침내 오래간 담금질 해온 나만의 투박하거나 빛난 언어로 다시 생명을 부여하라고 독려하기 때문이다.
글을 쓰려 하는 순간, 내 심장은 다시 예전의 문학소녀의 꿈으로 부풀었던 십대 시절로 돌아가곤 한다. 푸르게 펄떡이는 심장을 부여잡고 나는 부지런히 자판을 두드린다.
비록 그 시절은 지나갔지만 50을 바라보는 나는 이제야 나만의 글을 조심스레 써본다. 아무도 보지 않지만 언젠가 이 글들은 온전히 남아서 누군가에게 남을 나의 체취가 될 줄 믿는다.
내가 호흡하는 삶의 모든 순간은 지나가게 마련이지만 그 순간의 기록이 되는 글은 삶의 순간들과 생각, 느낌을 영원 불멸화 한다.
적어도 그 글을 통해서 특정 순간의 감상이나 생각, 삶은 영원한 것으로 남기 때문이다. 설사 내가 없더라도 나의 글을 계속 남아서 호흡하는 생명체가 될 줄 믿는다. 내가 남긴 말은 휘발되고 변형될 지언정 내가 쓴 글은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서 그 순간을 영원화 하는 숭고한 매개체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