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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대로 동행 Jul 21. 2022

문명사회에서 야성은 필요한가?

야성의 부름을 읽고

문명사회에서 야성은 필요한가?     


미국 작가 잭 런던은 문명의 세계에서 야성의 세계로 불시에 던져져 생존을 위한 무한 적응과 사투를 벌이는 개,  벅을 통해서 고상을 가장한 인간의 문명세계가 닌 한계와 민낯을 신랄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가 살았던 19세기 말 미국 사람들은 황금을 쫓아서 북극지역으로 이동하면서 당시에만 수십만 사람들이  황금의 꿈을 안고 각지에서 모여들었다.


19세기 말까지 신대륙의 발견과 이에 따른 정복전쟁 , 식민지 개척을 통해 형성된 인간 문명에서  황금은 너무나 중요한 삶의 방편이었기 때문이다.


잭 런던은 인간은 자신이 문명화되어 자연보다 우월하다는 착각을 지니고 있지만 실제 인간이 문명이라 칭하고 있는 고도의 경제, 문화, 집단생활 등이 실제로 광대한 자연과 야성 앞에서는 얼마나 무기력하고 연약한 것인가를 벅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그럼, 지금까지 인간이 고도의 학습과 집단생활, 규칙과 법의 체계 등을 통해 형성해 온 고도의 문명사회에서 야성은 과연 필요한 것일까?


 

아무리 인간이 고도의 문명사회를 이루고 기술의 발달, 생활의 편리 등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 해도 인간의 문명사회는 야성을 필요로 한다고 본다.


그것을 런던이 야성을 대변하는 주인공으로 설정한 벅의 삶을 통해 근거를 유추해 보겠다.

첫째, 야성은 근본적으로 척박한 환경과 시련을 이기게 하는 힘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벅은 처음에는 문명화된 세계를 대변하는 판사의 집에서 한없이 순종적이고 인간에게 친근한 동물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야성의 세계와 직면해 거친 눈길 위의 썰매를 끄는 자기 몫의 책임을 감당해야 할 때, 벅은 비로소 자신 속의 야성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야성이야 말로 척박한 자연환경과 약육강식의 세계를 이기게 하는 힘을 제공해 준다.

만일 벅이 자신 속에 내재된 고유의 야성인 상상력, 집중력, 투지를 발휘하지 않고 계속 문명화된 가정의 개로 남았더라면 벅은 진작에 죽음을 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벅은 자신 속 야성의 가치를 최대한 끌어내서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고 결국 리더 스키츠까지 물리친다.

두 번째, 야성은 자연에 대한 이해를 더해줘서 인간의 문명과 자연, 세계가  공존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작품 속 인간들 중 자신의 책임을 완수하기 위해 개를 이용한 사람들은 대부분 충실히 자신들의 임무를 수행하며 삶을 이어간다. 그러나 황금의 꿈을 좇아온 사람들은 대부분 황금을 차지하기는커녕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그들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는 자연, 세계의 질서 앞에 굴복했기 때문이다.


마 사디아 일행이나 손턴은 황금의 탐욕을 쫓아 길을 나섰는데 마 사디아는 자연을 우습게 여기고 준비를 제대로 안 해서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손턴은 다른 편인 인간들의 손에 죽는다.


 만일 이들이 벅처럼 자연에 순응하고, 자신의 삶에 적응하면서 탐욕보다 자신의 삶을 인내하고 받아들이는 야성에 충실했다면 결과는 확연히 달랐을 것이다.



이들은 한결같이 황금으로 상징되는 문명을 추구하는 사람들이지만 결과적으로는 그 문명으로 인해 죽음을 맞이한다.     


끊임없는 기술의 발전과 문명의 진보는 인간에게 여러 방면에서 혜택과 편리함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혜택과 편리만 안겨준 것이 아니라 이에 대한 대가로 끊임없는 욕망과 결핍도 안겨 주었다.


그 결과 인간은 결국 자신들이 이뤄놓은 문명사회에서 자신의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희생되는 아이러니를 빚고 있다.


 이를 볼 때 문명사회야 말로 우리에게 근본적인 성찰로 돌아가서 본연의 야성을 회복하고 이의 능력을 발휘해야 되는 터전임을 알려준다.


잭 런던 만들어낸 벅은 바로 그러한 야성의 부름에 충실함으로써 인간들에게 그들이 속한 문명사회 속에서  야성의 부름을 들어보라 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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