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작품을 모두 태워 달라는 유서를 남기고 41세 나이에 요절한 작가의 굴곡 많은 고단한 삶만 보더라도 우리가 범접할 수 없는 작가로서의 아우라가 느껴진다. 생전에 그는 자신의 작품을 발표해서 각광받는 영화를 전혀 맛보지 못했지만, 낮에는 법률 사무소에서 일하고 밤에는 자신의 글쓰기를 이해하지 못하는 가족들을 피해서 모두 잠든 뒤 매일 글을 썼다.
매일의 꾸준한 글쓰기를 통해서 150년이 지난 오늘까지 시공을 초월해서 전 세계인에게 사랑받는 걸작을 남겼다.
그는 ‘망원경으로 혜성을 살피듯 자신을 향해 매일 한 줄의 글이라도 써야 한다’는 말을 남겼다. 밤마다 자신과의 싸움이 되었을 치열한 글쓰기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오늘날 그가 관찰한 혜성들을 읽는 행복을 맛볼 수 없었을 것이다.
아이들과의 수업을 위해 카프카의 '변신'을 비롯한 여타 단편들을 읽고 책장을 덮는 순간 내 입에서 나온 탄식은 '어렵다, 무슨 말일까'의 한숨이었다. 그런데 자꾸 책 내용이 뇌리에 떠올랐고, 과연 그 작품들의 의미가 무엇이었을까 하는 호기심이 충족되지 않은 채로 나를 괴롭혔다.
수업 준비를 하기 위해 작품과 관련된 질문들을 대하며 나의 답답한 호기심이 조금이나마 해소되어 가는 기분을 느꼈고, 그런 느낌의 과정을 글로 남기고 싶어졌다.
무엇보다 내가 그의 삶과 작품을 통해 감동받았던 부분은 그에게 있어 글쓰기 자체가 숭고한 의식이자 그의 삶을 지탱하는 신앙이었다는 것이다.
오죽하면 그의 비문이 ‘내면을 사랑한 이 사람에게 고뇌는 일상이었고 글쓰기는 구원을 향한 간절한 기도의 한 형식이었다’ 일까.
나는 책을 좋아하고 글을 쓰고 싶어 하면서도 한 번이라도 그처럼 뜨겁고 간절한 적이 있었던가.
아니 책이나 글을 떠나서라도 삶의 어느 한 지점에서라도 그토록 절실하고 치열했던 적이 있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불과 41세의 나이에 요절했지만 그는 50세까지 살아온 나보다 정작 더 많은 것을 추구하고 남긴 사람이다.
그의 책 '변신'은 어느 날 갑자기 벌레로 변한 그레고리가 주인공이다. 부모님의 아들이자, 누이동생의 오빠로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자신을 돌보지 않고 고단한 외판원 일을 했던 그는 어느 날 갑자기 흉측한 벌레의 모습으로 변한 자신을 보고도 자신보다 가족을 더 염려한 따뜻한 사람이다.
그러나 벌레로 변한 그는 더 이상 가족들에게 아무 보탬이 되지 않고 부담스러운 짐이 될 따름이다. 처음에 그런 그를 가련히 여기며 돌보려 애썼던 가족들은 그가 있었던 자리를 대신해 각자의 생계 전선에 뛰어들며 점점 각박해지고 급기야는 자신들이 필요로 한 하숙생을 나가게 한 벌레를 향해 저것을 없애야 한다는 혐오감을 드러낸다.
처음에는 가족들의 심정이 십분 이해되었다.사랑하는 가족이 어느 날 벌레가 되어 나타났을 때 쉽게 납득할 수 있을까, 그것을 바라보는 가족도 얼마나 부담이 되었을까. 그러나 소설을 따라가다 보면 가족들은 그것이 그레고리임을 인지하고도 잔인하게 무시함을 알 수 있다. 어느새, 그는 그의 방을 가득 채운 쓸데없는 짐짝들처럼 그 집의 불필요한 짐이 된다.
한 때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자랑스러운 아들이자 오빠였지만 더 이상 그의 집에 그가 설 자리는 없다.
오늘 날도 우리가 효용성이 다한 가족이나 타인을 바라볼 때의 시선이 소설 속 가족과 다르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다른 단편인 시골의사, 원숭이 피터, 단식 광대의 이야기 등도 모두 비슷한 주제의식을 담은 슬프고 애잔하고 난해한 이야기들이다. 그런데 소설을 계속 따라가면서 나는 작품 속의 벌레 , 원숭이, 광대가 모두 카프카 자신의 분신임을 발견했다. 그는 때로는 그레고리처럼 생계를 부양하는 아들이자 때로는 자신의 예술혼을 포기하지 못해서 비참한 죽음까지 불사하는 단식 광대이기도 했고, 또 자신의 하녀가 겁탈당할 걸 알면서도 아픈 아이의 왕진을 나가는 시골의사와 같이 현실의 부조리에 눈감고, 도피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도피는 의사의 왕진이 그렇듯이 실상은 완벽하게 불완전하다.
어떻게든 인간 세계에 적응하면서 원숭이의 정체성을 버리려 몸부림치는 원숭이처럼 그도 현실 세계에 적응하고자 부단한 자기 분투를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바로 그가 법률사무소 일을 계속하면서 전업작가의 길을 끝까지 가지 않은 이유가 아닐까.
정직하게 자기 삶의 조각들을 이어 붙인 인물들을 소설로 창조하면서 카프카는 오늘날 실존주의 문학의 계보를 잇는 작가로 일컬어진다.
자신의 존재에 대한 물음을 안고 스스로의 삶을 책임지는 인간의 모습을 회복하자는 전후 세대의 중요한 문학 계보.
나는 고통스럽지만 삶을 뜨겁게 사랑하고 , 끝까지 예술혼을 불태운 카프카의 불꽃같은 창작열에 진짜 의미를 두고 싶다.
책은 우리 안에 있는 꽁꽁 얼어붙은 바다를 깨뜨리는 도끼가 아니면 안 된다
그의 말처럼 그의 작품들은 내 마음속에 꽁꽁 얼어붙어서 깨지리라 예상조차 못했던 의식을 시원하게 깨웠다. 그래서 그의 책을 통해 다시금
내 속에 스멀스멀 올라오는 열정을 감지한다.
글을 쓰고 싶다는 자기 최면만 걸었지, 실상 일상에 짓눌려 적당히 타협하고 안일하게 살아왔지만 이제 나도 그처럼 내 삶의 순간들을 담은 글을 쓰고 싶다.
카프카가 내게 준 가장 큰 선물은 현대인의 소외 등의 거창한 주제가 아니라 내 의식을 깨워준 이 도끼 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