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수를 시작한 큰 애가 학원을 다닌 지 한 달여 지났다. 수시에 합격한 대학이 있어서 정시 원서접수를 할 수가 없어재수 학원을 일찍 등록했다.
어둑한 새벽에 일어나셔틀버스를 타고 학원을 갔다가 밤 11시가 다 된 시간에 땀에 흠뻑 젖은 모습으로 돌아와서 종일 굶은 양 아들은 간식과 요깃거리로 게걸스럽게 배를 채운다.
월-토요일까지 매일 같은 스케줄로 학원을 오가는 게 힘겨워 보여 처음에는 많이 우려했다. 아침상을 차려놔도 먹지 못하고 나가기 일쑤였고, 올 겨울은 유독 추운 날이 많아서 셔틀버스 정류장까지 차로 데려다주곤 했다. 아이가 수험생이면 엄마도 수험생, 아이가 재수생이면 엄마도 재수생이 된다.
매일 아이보다 먼저 일어나 준비시켜 학원을 보내고, 아이가 돌아온 모습을 보고 하루 일과를 나눈뒤, 늦은 밤에야 엄마도 잠자리에 든다. 우리는 입시의 한 배를 타고, 꿈꾸는 섬을 목표로 매일 파도를 거슬러 도도한 항해를 한다.
누군가 그랬다. 재수는 인생을 배우는 시간이라고... 매일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고 , 외출과 핸드폰 등이 모두 금지된 상황 속에서 주 6일 동안 똑같은 일상을 견디는 삶. 적막한 밤중에야 집에 돌아와 썰렁한 자기 방에 가방을 밀어놓고 시체처럼 쓰러져 폰을 보다 뒤척이는 피곤에 겨운 삶.
아이는 그 속에서 단순히 공부가 아닌 인생을 배우고 있다.매일 정해진 시간에 반드시 일어나 자기 몫을 해내는 삶의 절박함을 터득한다. 아파도, 결석도, 지각도 안 되는 이 일상의 치열함에 점차 길들여지고 있다.
또래 합격한 친구들은 어울려서 술도 마시고, 아르바이트도 하며, 각지로 여행을 다닐 때, 혼자서 상호 대화 금지된 학원 구석에서 만 19세의 청춘을 우겨놓고 자신만의 삶을 사는 법을 배우고 있다.
" 엄마, 재수하는 애들은 루저예요. 제가 루저라는 생각이 가끔 들어요."
나는 눈가가 촉촉해서 자신의 선택을 아파하는 아들에게 말해준다.
" 아니, 선택이야. 네가 합격하고도 원하는 학교를 가고 싶어 선택한 거잖아. 그러니 기죽지 마. 네 나이에 벌써 루저가 어디 있니? 사람 인생은 죽을 때까지 모르는 거야."
하루는 진이 빠진 채로 돌아와 소파에 털썩 누운 아들에게 말을 건넨다.
"오늘 하루 많이 힘들었지?"
"아니요. 힘들지만 괜찮아요. 내가 선택한 거잖아요.
한 번쯤 이렇게 살아보고 싶었어요. 내신, 수행 다 신경 끄고 이렇게 공부만 하면서요. 그러니 책임져야지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방으로 들어갔다.
"재수한 뒤에 잘 돼서 나 같은 애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어요."라고 말했다가 이내 자신의 한계를 절감하고 아들은 다음 날 말을 바꾼다. "아무래도 전 그렇게 안될 것 같아요." 아이의 힘겨움과 아픔을 잘 알기에 나는 속으로 묵직한 울음을 삼키며 태연하게 말한다.
" 포기하긴 일러. 아직 네 갈길이 많이 남았잖아."
가끔 아들은 "해도 해도 공부할 게 많아 시간이 모자라요." 라고 말한다.
그래, 아무리 열심히 산다고 해도 인생은 그렇더라. 시간은 항상 부족하고, 늘 이뤄놓은 것은 비루해 보일 따름이다. 그 지독한 결핍을 메꾸느라 평생 분투하는 게 삶일 것이다.
아이의 재수는 결국 엄마도 변하는 시간이다.
나를 변화시키느라고, 더 넓은 품으로 아이와 세상을 품으라고 하나님이 내게 이런 시간을 주셨나 보다. 하고픈 말절제하기, 최대한 아이감정을배려하기,늦잠 자고, 밤늦게까지 폰보는 게 못마땅해도 침묵하고 기다리기,아이의 결정을 믿고 존중하기등.
상처야말로 더 꽃인 것을
아프고 힘든 네가 편안한 길을 가면서 수월한 인생을 살기를 바랐지. 실패와 낙담으로 네 삶이 얼룩지지 않고 더 이상 아프지 않기를 바라서 널 보호하려 최선을 다했지만, 엄마의 바람과는 상관없이 네 삶이 여기까지 흘러 왔구나.
이제는 조용히 견뎌내는 네 모습을 지켜볼 따름이다. 재수와 입시의 성공이 네 인생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안다. 설령 원하는 대학에 합격해도 그 기쁨이 영원하겠니. 언젠가 필연적으로 또다시 방황하는 시간이 오겠지. 또 실패한다 해도 그것 또한 네 인생에 다 필요한 일이라서 주어진 것이리라. 엄마가 좋아하는 시인 유안진 님의 시에 "상처가 더 꽃이다'가 있다.
그토록 막고 싶었던 네 삶의 상처, 이제 그것이야 말로 더 꽃인 것을 믿는다. 너의 꽃을 피우기 위해 매일 캄캄한 새벽길을 홀로 나서는 뒷모습을 본다. 무거운 가방에 짓눌려 구부정한 너의 어깨와 부스스한 머리.네가 가는 길 그 어딘가에 너만의 눈부신 꽃을 반드시 피울 줄 믿는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힘든 시절이 필요하다. 그 시절을 좀 더 겪어야만 좀 더 성숙해지니까. 일의 필요성을 느끼고 고통을 참고 이겨내는 방법을 깨닫기 때문이다. -이상권 '고양이가 기른 다람쥐' 중-
부시도록 빛나는 10대의 마지막 해, 너는 고통을 참고 이겨내는방법을 배우는구나.
이 힘든 시절을 통해 비로소 진짜 네 모습, 네 삶을 찾길, 그래서 마침내 너만의 꽃을 피우길 엄마는 간절히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