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년 10-12월 우울증 탓에 극단적인 생각마저 할 정도로 힘들었던 나를 구한 건 한국 여성이 쓴 두 권의 책이었습니다."
일본 정치학자인 아사바 유키 (47. 리쓰메이탄대 동아시아센터 부소장) 도시샤대 글로벌지역 문화학부 교수가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그가 읽은 책은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백세희 저)'와 '당신이 옳다(정혜신 저)' 두 권으로 그는 "태어날 때 부모 뽑기를 잘못한 데다가 직장 상사 갑질로 인해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라고 고백했는데, 이 두 권의 책을 읽고 마음의 안정, 공감과 위안을 얻었다고 한다.
덕분에 그는 '개인적인 경험을 담았지만 보편성이 있는 두 권의 책은 회복의 큰 계기였다'라고 고백하며 이로 인해 약처방이 줄어들 정도로 자신의 우울증 상태도 많이 호전되었음을 밝혔다.
그의 인터뷰 기사를 보면서, 바다 건너 이국의 낯선 타인의 삶에까지 영향을 준 개인적 서사를 담은 책의 위력을 실감했다. 두 권의 책을 나는 아직 읽어보지 않았지만, 작가 자신의 개인 경험을 담은 책으로 인해 동시대 비슷한 고민과 좌절을 경험한 타인의 삶에 깊은 공명과 위로를 줄 수 있다는 건 얼마나 위대한 일인지 실감했다.
나는 글과 책이 지닌 위대함이 바로 이런 영향력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그는 책을 통해서 "일본에 한국은 무엇인가라는 고민을 정치학자로서가 아니라 벌거벗은 한 사람으로서 하게 됐다'는 수확도 얻었다.
많은 사람들이 요즘은 책을 읽지 않는 시대라고 통탄한다. 책을 내고자 하는 사람은 많지만 읽는 사람은 점점 줄어서, 알려진 유명인이 아니면 자신의 책이 대중의 주목을 채 받지 못하고 매대에서 사라지는 것도 흔치 않게 보는 요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글과 책이 우리 사회에서 힘을 지닐 수 있는 건 바로 이런 영향력을 끼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글은 쓰는 사람의 내면을 돌아보고 치유하는 효과도 있지만, 읽는 사람에게도 작가의 쓰는 동안의 고뇌와 아픔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따라서 읽는 사람의 삶과 심중에 무의식 중에 선명한 발자국을 남기는 수단이다. 한 권의 책은 그것을 작가만큼 진지하게 읽고 받아들이는 사람의 삶을 바꿀 수 있는 위력이 있으며, 우리는 그것을 역사상 많은 사람들의 삶을 통해서도 확인해 왔다.
나 역시 10대 시절 나를 미치도록 열광케 했던, 헤르만헤세,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 등의 작품을 읽으면서 달뜬 가슴으로 흥분과 놀라움에 휩싸였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시절의 기억들이 50 평생 살아온 지금까지 여전히 읽고 쓰게 하는 동력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사람들이 책 대신 동영상과 sns에 탐닉하고, 종이질 특유의 감촉 속에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들여 몰입하는 행위가 날로 희귀해지는 세상 속에서 나는 일본인 교수의 인터뷰를 통해 책의 여전한 진짜 희망을 보았다.
그의 인터뷰를 읽고, 재수 생활을 하면서 숨 막힐 듯 고단한 일상을 감내하는 아들이 '힘들지 않냐'는 엄마의 한 마디에 건네줬던 말이 떠올랐다.
"엄마, 제가 힘들었던 그간의 경험을 언젠가 책으로 써서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요. 나처럼 힘들었을 누군가에게 그렇게 희망을 주고 싶어요."
아이가 가슴속에 꾹꾹 담아 두었던 비밀스러운 소망을 들었을 때, 나는 아이에게서 엄마인 나보다 더 깊은 땀내 진동하는 희망을 보았다. 누군가에게 희망의 언어를 들려주고 싶다는 소망으로 감내하는 고통이라면... 죽을 만큼 힘든 시간이지만 나름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엄마로서 꾸준히 글을 쓰는 건 , 언젠가 그 아들의 소망을 이루도록 도와주기 위한 마음도 있다.
두 명의 여성이 자신의 경험을 담아 쓴 소중한 책들이 바다 건너 일본에 사는 한 남자의 우울증을 극복하게 해 주고 삶의 희망을 불어넣어 주었듯이, 나의 아들도, 그리고 글쓰기의 고통스러운 분투를 감내하는 우리 모두도 충분히 그런 이야기를 쓸 날이 올 줄 믿는다.
그의 인터뷰를 통해서 나는 주변에서 별로 인정받지 못하고, 나 자신조차 가끔 제대로 가고 있는지 스스로 의심하는 글쓰기 여정 속의 희망을 보았다.
단 하나의 사실. 진짜 진실은, 이야기 안에 존재하는 가치예요. 이야기 속에는 어떤 진실이 있어야 하니까요. 그렇지 않으면 뭐 하러 고생해서 이야기를 하겠어요.
- 장클로드 그럼 베르트 '세상에서 가장 귀한 화물'중-
자신의 할아버지가 겪었던 홀로코스트의 경험담을 바탕으로 '세상에서 가장 귀한 화물'이라는 가슴을 아리게 하는 슬프고 아름다운 동화를 쓴 작가가 말했다. 그가 역사상 가장 잔혹한 페이지 중의 하나였던 그 대학살의 이야기를 도리어 인류에게 사랑을 전하는 도구로 썼듯이, 우리가 겪는 모든 일상도 진실을 담은 도구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
생명을 잉태하는 고통 못지않은 산고 끝에 나온 책과 글들로 누군가의 이야기가 타인의 삶을 치유하는 위대한 목소리로 거듭나는 것. 오늘 나는 낯선 일본인의 인터뷰를 통해 그 희망을 보았다.
그의 인터뷰를 읽고, 늘 변변찮은, 그래서 나만 즐기는 게 아닌가 자문하며,자신의 재능과 꾸준함, 결과물에 늘 의구심을 품었던 나 자신에게도 위로를 건네본다.
'네가 겪는 모든 일들, 활자화된 모든 진실들이 언젠가는 눈부신 꽃으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매일 우직하게 한 번도 안 가본 길을 걸어가듯이 그렇게 즐겁고 신나게 걸어가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