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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대로 동행 Apr 26. 2022

나는 진정 보는 자인가?

'눈먼 자들의 도시'를 읽고

코로나가 창궐하여 전 세계가 공포에 떨며 방역에 힘쓰는 요즘 매일 대하는 확진자의 숫자가 이제 더 이상 특이한 뉴스가 아닌 세상이 되었다.

마스크를 쓰는 게 일상이 된 요즘 나는 문득 포르투갈 작가 주제 사라마구의 이 소설을 떠올렸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마치 이 눈먼 자들의 도시처럼 전염병이 휩쓰는  황폐한 세상이라는 생각도 들었고 우연히 신문지면을 통해 주제 사라마구의 인터뷰를 보고 흥미를 느꼈기 때문이다. 언제쯤 이 세상이 살기 좋아질 것 같냐는 기자의 질문에 주제 사라마구는   ‘이 세상이 앞으로 더 좋아진다고요? 앞으로 더 나빠질 일만 남았다고 봅니다. 그나마 지금이 나은 게 아닐까요?’ 마치 묵시록처럼 이 세상의 미래를 정확히 예견하는 듯한 그의 말이 가슴을 찔렀다. 그래서 한 번쯤 그의 이 대표작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6시간 가까이 쉬지 않고 이 책을 단숨에 읽어낸 뒤 나는 저녁 설거지를 하느라 싱크대에 서있는 자신의 모습조차도 얼마나 경이롭고 감사한 것인가를 돌아보게 되었다.

이렇게 콸콸 시원하게 쏟아지는 물을 사용할 수 있음이 얼마나 감사한가. 지금까지 당연하게 여겨왔던 일상의 모습들이 이제 더 이상 당연하지 않은 엄청난 축복으로 여겨지는 관점의 전환을 체험했다.


작품 해설에서 이 작품을 번역한 김용재 교수가 이 작품을 읽은 뒤  ‘우리가 어느새 우리도 모르게 작가의 담론에 이끌리는 자신을 발견하고 조금씩 인습과 편견, 고정관념과 정형화된 삶으로부터 해방되어 가고 있음을 느끼는 순간‘이라고 언급한 그 순간의  발견이었다.      


소설은 사람들에게 눈이 보이지 않는 백색 실명이 빠른 속도로 전염되어 가는 도시의 긴박한 순간에서 시작된다. 운전 중 신호대기 중이던 첫 번째 실명자가 발생한 이후 그를 집까지 바래다준 뒤 그의  차를 훔쳐간 도둑, 첫 번째 실명자의  아내는 물론이고 그를 진단했던 안과의사와 병원 내 있던 환자, 간호사들까지 걷잡을 수 없이 실명은 퍼져 사람들의 일상을 마비시킨다.


소설 속에서의 실명은 모든 희망이 사라진 세계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단순히 시력을 상실할 뿐 아니라 그들이 가진 모든 소유와 관계, 일상을 박탈당한다.

그들은 강제적으로 정부에 의해 정신병원 건물을 개조한 수용소로 끌려가고 그곳에서 철저하게 인권이 말살된 환경하에서 날마다 생존을 위한 분투를 이어간다. 소설 속의 유일한 희망의 끈은 바로 수용소로 끌려가는 남편을 따라 들어간 의사의 아내이다. 그녀는 유일하게 눈이 멀지 않은 사람이었지만 남편을 위해 기꺼이 동행하고 수용소의 참상 가운데에서 유일하게 인간 본연의 고상함, 인류애적인 사랑을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더럽고 불결한 침대와 환경, 턱없이 부족한 화장실, 오염된 수돗물, 그리고 부실한 식사, 그리고 군인들의 통제와 감시, 눈이 보이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만일 눈이 보였더라면 도저히 감내할 수 없었을 정도의 열악한 환경이다.


특히 이 작품에서 주제 사라마구는 유독 인간의 배설물에 대한 묘사를 상세하게 반복한다. 사람들이 화장실을 찾지 못하거나 불편함을 감수하기 싫어서 아무 데나 싸놓은 배설물들은 결국 복도며 수용소 전체를 더럽히는 원흉이 되고 사람들은 자신들이 배설한 그 더러운 배설물들 위를 밟고 지나다니며 인간의 존엄이 얼마나 훼손되었는지를 절감하고 절망한다.


그리고 급기야 이 배설물들은 도시 전체를 뒤덮다시피 한다. 이제 처음의 절망도 잠시, 배설물은 그들 일상의 일부가 된다. 어쩌면 그들이 배설하고 밟고 더불어 사는 오물과 배설물들은 결국 우리가 사는 이 시대의 부정과, 폭력, 사기, 술수 등의 더러운 이면을 상징하는 건지 모른다. 우리도 처음에는 그것의 불결함에 대해 치를 떨고 절망하나 이내 그 위를 밟고 다니면서 아무렇지 않게 생을 영위하고 있지 않는가.


그러나 이것은 다가오는 진짜 위기에 비하면 차라리 사소한 문제이다. 병이 순식간에 도시를 휩쓸면서 수용소 인원은 나날이 늘어가고 급기야는 총을 소지한 깡패 일당이 수용소를 평정하기에 이른다. 그들은 그간의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함께 도우며 어렵게 생존을 영위하는 수용소 사람들의 존엄을 무시하고 거대한 공포감을 조장하며 권력을 획득한다. 의사의 아내와 몇 사람이 보여준 헌신과 희생의 모습이 인간의 선한 모습을 상징한다면 이들은 전형적인 악의 모습을 상징한다. 이들은 얼마 안 되는 식량마저 자기들 수중으로 장악하고 사람들의 돈과 귀금속을 갈취하며 급기야는 힘없는 여자들의 성까지 잔인하게 착취하는 만행을 서슴지 않는다.


악의 극치를 달리는 이들의 모습은 막다른 골목과 같은 절망적인 상황에서 인간이 어디까지 악해질 수 있는지 그 전형을 보여준다. 절망 속에 눈물을 흘리는 여자에게 다가가 의사의 아내는 말한다. ”누구나 약해질 때가 있죠. 우리가 울 수 있다는 건 좋은 거예요. 때로는 눈물이 우리를 구해주기도 하거든요. “ 그러자 울던 여자가 답한다. ”울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을 때도 있는 거죠. 우리한테는 구원이 없어요. “ 인간 본성의 가장 극악한 밑바닥을 드러내 보이는 일당의 만행 앞에서 이제 이들은 시력뿐이 아닌 희망도 잃어버린 것이다.


실낱같은  구원의 가능성조차 안 보이는 상황 속에서 의사 아내는  깡패 무리의 두목을 살인한다. 물론 이 살인이 정당화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은 남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그녀의 선택이 나름 현명했다고 생각한다.

그런 선택이 없었다면 수용소는 저들의 악행으로 더 처참하게 무너졌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무력하게 눈물로 구원 없음을 한탄하던 그들은 이제 새로운 기로에서 수용소로부터의 탈출을 선택한다. 그래서 화재가 난 사이 수용소를 탈출한 7명만이 생활을 이어간다.



소설 속의 무능한 정부는 이들을 위해 어떤 도움도 주지 않고 위협하고 엄포만 놓다가 아예 존재감이 사라져 버린다. 이들을 생존하게 만든 건 철저히 이들 간의 끈끈한 연대, 그리고 서로를 배려하는 사랑의 힘이다.


의사는 ” 내가 다시 시력을 회복한다면 나는 다른 사람들의 눈을 주의 깊게 볼 거야. 마치 그들의 영혼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라고 고백한다. 육신의 눈은 실명했지만 이제 그는 영혼의 눈을 뜨고 보는 법을 배우게 된 것이다. 의사뿐 아니라 자신의 집을 기꺼이 타인을 위해 내준 첫 번째 실명자, 늙은 아저씨와 함께 살겠다는 검은 안경을 꼈던 여자 등 사람들은  육신의 눈은 잃었지만 드디어 서로를 진심으로 이해하는 마음의 눈으로 보는 법을 배운다. 물론 그 선두에는  의사 아내의 희생이 있었다. 그래서 검은 안경을 꼈던 여자는 고백한다. ”우리 내부에는 이름이 없는 뭔가가 있어요 그 뭔가가 바로 우리예요. “

우리라는 끈끈한 연대가 이들을 눈먼 자들의 황폐한 도시 한 복판에서 구원하는 희망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결국 이들의 자비를 담은 연대는 성공하고 첫 번째 실명 자부터 순서대로 눈을 뜨면서 소설은 끝을 맺는다. 물론 의사 아내는 이제 자신이 실명할 차례가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녀가 자신이 베푼 희생에 대한 보답을 받을지 여부는 독자의 상상에 맡겨진다.      



주제 사라마구는 작품 속 인물 중 누구에게도 이름을 부여하지 않는다. 철저한 익명성 뒤에 가려져서 그들은 검은 안경을 꼈던 여자, 첫 번째 실명자 등 그들을 규명하는 특징으로 정의된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에 우리는 그들 각자의 캐릭터와 모습을 더 깊이 있게 상상하고 이는 또한 현대인들의 익명성, 우리가 타인을 정의하는 관점을 상징한다고 생각된다.



소설은 특이하게도 문장부호가 생략되어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해야 내용의 흐름을 따라갈 수 있다. 작가는 우리가 그런 집중력으로 자신의 소설 속에 강력하게 흡입되길 기대한 건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의 작전은 대성공이다. 나는 이 작품을 숨죽이며 따라가는 이틀간, 역한 냄새와 오물, 시체 썩는 냄새와 핏물이 낭자한 수용소와 시체, 약탈의 현장, 거친 짐승들이 배회하는  황량한 도시를 함께 돌아다녔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루어낼 수 있는 유일한 기적은 계속 살아가는 거예요, 매일매일 연약한 삶을 보존해가는 거예요 삶은 눈이 멀어 어디로 갈지 모르는 존재처럼 연약하니까. ’     


살아간다는 게 이토록 숭고하고 위엄 있게 느껴질 때가 또 있을까? 시력을 상실한 이들의 분투는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않을까 했던 나의 생각을 부끄럽게 만들 정도로 처절하지만 아름다웠다. 어쩌면 우리가 매일 살아간다는 것은 그렇게 단순하고 당연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 이것이야 말로 비록 연약할망정 가장 빛나는 의무이자 축복이 아닐까?


지금 내 눈앞에서  주제 사라마구가 질문한다.

‘당신은 진정으로 볼 수 있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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