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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대로 동행 Sep 26. 2023

행복한 기억을 위해

기억을 선택하다

아빠를 뵐때마다 우리는 함께 기억을 거슬러 과거 여행을 떠난다.


숨이 가빠 말하시기도 힘들지만, 대화를 할때마다 아빠는 있는 힘을 짜내 과거 기억을 회상하시곤 한다. 그런데 이상한 게 불과 하루 이틀전의 일은 가물가물하다며 헷갈려 하시는 아빠가 수십 년전의 일은 마치 어제 일처럼 선명하게 복기해서 술술 얘기하시는  아닌가.


20년, 30년전 심지어 50년도 더 된 과거의 기억을 복기하면서 아빠의 표정은 마치 그때로 돌아간 듯 황홀한 미소를 지으신다.


엄마와 결혼하시기 전 맞선 봤던 얘기, 다리를 못쓰시는 아빠가 친구들과 함께 호기롭게 등산길에 올라 목발을 짚고 보란 듯이 정상을 정복하셨던 이야기, 혼자 바닷가에 가서 분위기 잡고 모래 위를 걸으시다가 모래들 사이로 목발이 움푹 빠져 주변의 도움으로 간신히 헤어 나오셨던 이야기....


아빠의 기억은 마치 영사기를 돌리듯, 과거로 돌아가 영화의 이전 장면을 복원하듯 생생한 얘기들로 살아난다.  좀체로 들어 보지 못했던 아빠의 과거 기억들을 들으며 나는 가끔 후미진 곳에 먼지 켜켜이 쌓인 채 보관되었던 흑백의 낡은 영화를 돌려 보는 듯한 경이로움을 느낀다.


신기한 표정으로 "아빠, 그 기억들이 다 나세요?" 하고 물으면 아빠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럼, 그걸 어떻게 잊겠니? 이건 너한테만 말하는 비밀인데..."라면서 별반 비밀같지 않은 예전의 은밀한 추억들을 술술 풀어 내신다.

아내가 살해당한 후, 10분밖에 기억 못하는 단기기억상실증에 걸린 남자가 그나마 남은 증거를 통해 범인을 쫓는 영화 '메멘토'에서 '기억은 기록이 아니라 해석이다'라는 대사가 나온다.


우리는 자기 기억이 가장 정확하다고 생각하지만, 실상 그 기억은 나의 경험과 느낌을 통해 정제되고 변형된 것이기 때문이다.


아빠는  날마다 당신의 기억들 중 특정 기억을 선택해 해석하신다.

천장만 바라보며 누워 지내는 생활 속에서 그 천장을 화면 삼아 자신의 가장 사랑했던 옛기억들을 취사 선택해 날마다 영상 돌리듯이 돌려 보며 해석하는 낙으로 지금의 힘겨운 나날을 버티고 계신지 모른다.


예전에 어느 유명 여가수가 삶의 목적을 묻는 질문에 "저는 행복한 기억을 위해 살아요. 행복한 기억이 많다는 건 그만큼 인생을 행복하게 살아왔다는 뜻이쟎아요."라고 대답했던 게 생각난다. 나이답지 않던 조숙한 대답에 그 순간은 고개를 갸우뚱 했지만, 이제는 고개가 끄덕여진다.


영영 돌아오지 못할 지금 이 순간이 아빠에게  행복한 기억의 영상으로 남도록, 나는 아빠와 하루치의 영화를 찍는다.  먼 훗날, 다시 그 시간으로 돌아갈 수 없을 때, 기억의 영상들을 홀로 돌려 보며 영상 속 순간들을 많이 그리워하겠지.


그래서 지금 여기 소멸될 그  순간들을 붙잡으려 글로 남긴다.

언젠가는, 초췌한 얼굴이지만 눈빛만은 소년처럼 맑게 빛내며 삶의 가장 아름다웠던 기억들을 들려주신 아빠의 모습을 더는 못볼 날이 올 것이다.

그러나  글로 남겨진 시간들은 그때의 향기와 표정을 상기시키는 힘이 되어 두고두고 나에게 사랑하고 살아갈 힘을 줄 것이다.


이렇게 최근의 기억이 형편없이 희미해지는 반면 오래된 젊은 날의 기억은 변함없이 생생하고 어린 날의 기억 중에는 미세한 부분까지 놀랄만큼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도 있다. 때로는 그게 정말 있었던 일일까, 상상력이 만들어낸 환상일까 의심스러울 적도 있다.


박완서 '아름다운 것은 무엇을 남길까' 중-


올 추석은 환상을 의심할 정도로 행복한 기억을 만들어 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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