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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대로 동행 Jan 06. 2024

우리는 언제나 다른 고래와 마주칠 가능성을 안고 있다

모비딕을 읽고

19세기 미국 소설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히는 허먼멜빌의 모비딕은 그가 31세에 쓴 소설로 지금으로부터 165년 전에 쓰였습니다. 오랜 세월에도 불구하고 모비딕은 세월의 기세에도 전혀 바래지지 않은 선명한 메시지와 해석으로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끊임없이 영감과 기쁨을 주는 역작입니다.


허먼멜빌은 자신의 경험과 당시 포경선들이 바다에서 실제 겪는 일, 고래에 대한 강박적으로 철저한 자료조사를 토대로 고래와 고래잡이에 대한 백과사전에 견줄만한 이 소설을 써냈습니다.


작품의 시작은 '내 이름을 이스마엘로 불러다오'로 시작합니다. 이스마엘은 성경 속 믿음의 조상으로 불리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대신 자신의 의지로 여종 하갈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입니다. 아브라함은 내심 그를 장자로 대를 잇게 하려 했으니 결국 대를 이은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자녀 이삭이 되었지요.


그런 의미에서 이 이름은 작품 속에서 주류인 백인사회에도 이방인 사회에도 완전히 소속되지 않은 작중 주인공의 입장 대변하고 있습니다. 성경 속에서 이스마엘이 끝내 이스라엘 민족의 일원으로도 완전한 이방인으로도 편입되지 않았듯이 말입니다.  


작품을 이끄는 주인공  아합은 성경 속 북이스라엘을 이끈 가장 악한 왕의 이름에서 따왔습니다. 작품에서 아합 선장은 흰고래 모비딕을 죽이려는 복수열로 인해서 자신은 물론 배안의 모든 선원을 죽음에 이르게 한 악랄하고 무모한 인물로 그려지지요.

이 작품은 주인공 이스마엘이 삶의 무료함을 느끼고 세상 창조의 비밀을 알아보겠다는 그럴싸한 목표를 위해 고래잡이를 하러 미국 낸터킷로 향하는 데에서 시작합니다. 그곳 숙소에서 그는 코코보크 섬의 추장 아들 퀴퀘그를 만나고 둘은 함께 아합 선장이 이끄는 피쿼드호에 승선하지요.


아합선장은 40여 년간 배를 타온 60대의 베테랑 선장으로 모비딕에게 잃은 한쪽 다리 대신 고래뼈로 인공다리를 사용합니다. 배를 타고 항해하며 이들은 망망대해의 무료함을 견디기도 하고, 오랜 기다림 끝에 숙원 하던 고래를 만나 사력을 다한 싸움 끝에 마침내 원하던 기름을 얻기도 합니다.


그들이 고래와 사투를 벌일 때나  평화로운 햇빛아래 바다 위를 거닐 때나 바다는 한결 같이 그들의 삶을 지탱해 주는 터전이 됩니다.  작품에서는 이들의  배안의 생활, 다양한 고래의 생태, 고래 잡는 과정의 치열함 등을 숨 막힐 정도로 사실적이고 적나라하게 묘사해서 읽는 내내 가슴을 졸이며 함께 거대한 대해를 거니는 짜릿함을 선사합니다.


작가는 자신의 경험에 더해 세상을 압도할만한 놀라운 상상력으로 우리를 피쿼드호에 승선시킵니다. 작품 속 아합 선장이 모비딕에 대한 복수의 의지를 다질 때마다 그의 강력한 카리스마에 압도된 선원들은 함께 흥분해서 동조합니다.   


그 안에서 유일하게 이성적인 조언을 건네며 자연을 존중하는 사람은 일등선원 스타벅뿐입니다.

당시 미국의 고래잡이 명문가인 스타벅 가문에서 따온 이름의 스타벅은 작품 속에서 아합과 대치되는 인물로 삐뚤어진 복수욕에 눈멀어 스스로 파멸을 좌초하는 아합 선장에게 '복수에는 자비가 없습니다. 더 큰 슬픔만을 낳을 뿐이지요'라면서 만류합니다. 


그러나 멈출 줄 모르는 아합선장의 잔인한 복수욕은 끝내 모비딕을 발견한 순간 미친 듯이 폭주하고 결국 그는 자신이 그토록 저주하던 모비딕 몸에 로프로 묶인 채 함께 바닷속으로 잠기고 선원들도 비참한 종말을 맞이합니다. 유일한 생존자 이스마엘은 친구 퀴퀘그가 자신의 죽음을 위해 짜놨던 관에 의지해 이전에 만났던 배 레이철호에 의해 구조되며 작품은 끝납니다.

작품 속에서 아합선장과 만났던 배들은 한결같이 그의 복수를 만류했으나 그는 끝내 자신의 무모한 의지를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아들이 탄 보트를 같이 찾아 달라던 레이철호 선장의 청까지 거절했지만 결국 결론에서 이스마엘을 구한 건 바로 그 레이철호입니다.


'너는 결코 나를 파멸시키지 못할 것'이라며 모비딕을 향해 호기로운 복수 선언을 한 아합선장은 자연과 운명의 섭리를 거스르며 파괴를 일삼은 인간의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당시 19세기 문명을 발전시킨다는 명목하에 서슴없이 자연을 파괴했던 인간에 대한 비판의식이 그의 모습 속에 보입니다.


또한 망망대해를 항해하다  예기치 않은 때 고래를 만나 치열한 사투 끝에 잡아 기름을 짜는 등의 고단한 뒤처리 뒤, 숨 돌릴만하면 다시 고래나 폭풍우를 만나는 이들의 여정은 우리의 인생을 닮았습니다.  우리도 평안한 일상 속에서 문득문득 예기치 않은 고래를 만나 치열한 삶의 전쟁을 치르며 살지요. 삶은 늘 그렇게 상승과 하강, 때로는 수평 곡선을 반복하지요.


멜빌은 소설을 '붙잡기 어려운 삶의 진실을 말하는 위대한 기예'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아합 선장 속에 그의 모습이 많이 투영되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붙잡기 어려운 모비딕을 찾아 끝이 안 보이는 바다를 속속 뒤지던 선장의 집념이 어쩌면 자신의 방에 스스로를 가두고 치열하게 소설을 썼던 작가 자신의 모습이 아닐까요.


그런 의미에서 모비딕과 같은 그 거대한 진실을 잡기 위한 지난한 과정이 그의 소설로 형상화된 게 아닐까요?


그래서 선원들 모두를 죽음으로 내몰고 자신마저 파멸시킨 아합의 어리석어 보이는 선택을 저는 마냥 비판만 하기가 주저됩니다. 어쩌면 우리도 삶의 거대한 고래 앞에서 한 번쯤 그렇게 호기롭게 도전해서 승리하고픈 야망을 갖고 있지 않을까요?

물론 자연과 운명을 향한 그의 교만함, 자기 삶의 결핍을 모비딕 탓으로 돌리는 모습에는 아쉬움이 남지요.


어쩌면 우리 삶도 때로는 아합, 때로는 스타벅, 이스마엘과 같이 흘러가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작품은

우리는 언제나 다른 고래와 마주칠 가능성을 안고 있었다. 우리가 대청소를 끝낸 바로 그 순간 새로운 고래가 나타났다면, 또다시 그 힘든 과정을 겪어야 할 것이다. 고래잡이의 생활은 그런 것이다. 그리고 인생 또한 마찬가지이다. 라면서 끝을 맺습니다.



중학교 아이들과 수업을 통해 나눈 책입니다.


아합 선장의 선택과 삶에 대한 우리의 생각은?

내가 아합이었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모비딕 입장에서는 이런 인간을 어떻게 보았을까?

지금 내 앞의 고래는?

함께 나눠보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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