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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대로 동행 Apr 23. 2024

내가 조커 같아요

내 안의 이중성에 대하여

아침 일찍 깨워 밥을 먹이는데 고3인 둘째 호가 수저를 들다 말고 한숨을 쉰다.

밥상 앞에서 웬 한숨이냐고 물으니 아이가 묵직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한다.


"엄마, 영화 조커 알아요? 가끔 내가 조커가 된 것 같아요."

영화 조커를 보지 않아서 내용만 대충 들은 내가 눈을 껌뻑거리며 쳐다만 보자 아이가 부연설명을 했다.


"친구들이 날 볼 때마다 너는 아무 걱정 없이 행복해서 좋겠대요. 그렇게 늘 웃고 다니니 세상 걱정 하나 없는 애 같다고요. 그런데 친구들과 헤어져 혼자 집으로 올 때는 마음이 돌덩이처럼 무겁고... 불행감이 밀려와서 견딜 수 없어요. 학업, 입시, 진로... 제가 얼마나 고민이 많고 힘든데요."

아이가 말하는 게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수십 년 전 내가 단발머리 여고생일 때에도 아이와 같은 감정에 극도로 흔들렸던 경험이 떠올랐다.

마주치는 친구들마다 손 흔들며 인사하고, 항상 반에서 웃기는 농담을 잘 걸어주는 나에게 친구들은 세상 걱정 없는 막내딸 보는 것 같다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그 당시 우리 집은 부모님 사업이 어려워 남의 집 2층에 세 들어 살았고, 급작스레 어려워진 형편에 밤마다 다투는 부모님의 싸움 소리로 밤잠을 설치곤 했다.


친구들이 인근의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아파트나 주택에서 등하교를 할 때, 나는 한참 떨어진 외곽의 변두리 주택가에서 버스 노선도 없는 길을 등교하느라 매일 다른 친구들보다 30분 이상 일찍 나오는 수고를 감수하느라 헉헉거렸다.


부자 아이들이 많이 사는 강남 8 학군에서 친구들이 각자 사는 아파트 브랜드 등을 물어보며 암묵적으로 갈라 치기를 하는 틈에서 일부러 기죽지 않으려 더 명랑한 척, 아무렇지 않은 척 스스로를 가장했다.  

그때 친구들을 뒤로하고 혼자만의 외로움과 적막함을 곱씹으며 터벅터벅 집으로 향한 내 10대의

한 페이지가 떠올랐다.


색깔은 다르지만 어쩌면 아들이 느낀 조커의 감정도 그와 같은 것이 아닐까.

학원에서, 독서실에서 자신을 조여 오는 한계의 벽을 넘으려 무수히 스스로를 다그치며 머리 싸매고 공부하는 애가 정작 친구들 앞에서는  자기 속의 좌절감, 장래에 대한 불안, 건강상의 약점, 잘하는 친구들을 향한 묘한 질투를 가장하기 위해 조커처럼

 더 명랑한 척, 즐거운 척한 게 아닐까.


아이를 보면서 인생은 남이 보는 나와 진짜 나 사이의 복잡하고 미묘한 간극을 메우는 과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설사 조커 같이 불안한 현실과 보여지는 모습이 상반되고  낯설더라도 그것조차 나의 일부임을 인정하며 살아갈 수뿐이 없음을 아들은 배울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내 안의 두 자아 사이의 거리감을 좁히면서 자기 내면을 더 단단하게 다져나가는 게 어른이 되는 과정임을 이해하겠지.


아이를 학교에 보낸 뒤 곰곰이 생각했다.

나도 누군가 그가 보여주 모습을  온전한 그로 착각하고 무심한  말의 화살을 날리지는  않았나.


이제라도 내게 보이는 그의 모습이 결코  전부가 아님을...

그도 자기 삶의 빈 방에서 홀로 울거나, 고통으로 몸을 떨고 있을 수 있음을 기억해야겠다.


누구든 자기 안의 조커를 하나씩 갖고 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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