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작년에 아버님이 돌아가신 이후 어머님은 몸과 마음이 쇠잔해지셨다. 요새는 밤에도 잠을 못 이루는 날이 많다고 한다. 함께 지내시던 집에 덩그마니 혼자 남으신 이후 부쩍 외로움과 공포심이 늘었나 보다.
나에게 세상에서 제일 존경하는 사람을 꼽으라면 우리 부모님 다음으로 시어머님이다.
어머니는 아담한 키이지만 동그란 얼굴, 통통한 몸매, 온화한 인상이시다. 결혼식 날, 친구들이 어머님을 보고 나에게 시집살이 안 해서 좋겠다고 덕담을 건넸을 정도로인상이 선하고 푸근하시다. 처음 시댁에 인사 간 날, 며느리감이 인사 온다고 온 집에 도배를 새로 하시고, 푸짐한 음식상에 빨간 니트로 한껏 멋을 내신 어머님의 정정한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어머님은 며느리인 나의 생일날마다 결혼 후 20여 년 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용돈을 챙겨 주신다.
두 아들을 낳고 사업하느라 직장에 나가는 나를 대신해서 아이들을 키워주신 분도 어머님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당신도 연세 들어 체력이 기울기 시작하셨던 때인데 외손주까지 손주 3명을 어떻게 키워 주셨는지 어머님의 사랑을 생각하면 가슴이 저리다.
나에게 한 번도 힘들다는 내색 한 번 없이 말없이 손주를 키워주시던 어머님은 내가 매월 드린 용돈을 모아서 어느 날 수 천만 원의 목돈을 건네주셨다. 그 돈 속에 숨겨진 어머님의 사랑이 가슴을 적셔서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셋째를 가지면서 사업을 정리하고 두 아들을 데리고 와서 손수 키웠다. 세 아들을 키우면서 그동안 어머님의 수고와 눈물이 선명하게 보여서 가끔씩 눈물지었다. 아이들 속에 어머님의 모습이 보이곤 했다. 된장찌개, 청국장을 너끈히 먹고, 어디서든 뒹굴거리며 잘 자는 아이들은 할머니의 손으로 키워주신 사랑의 흔적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그렇게 키워주신 손주들이 이제 할머니보다 훨씬 키가 큰 10대 청년들이 되었다.
수년 전 마포에 사시는 부모님을 설득해서 용인 우리 아파트 부근으로 이사 오시게 했다. 어머님과 나는 이제 도보로 10분 거리 내외에 산다. 남편은 어머님의 안부를 보러 매일 출퇴근 때마다 들르는데 나는 바쁘다는 핑계로 그리 자주 들르지 못한다. 대신 가끔 바쁜 아이들까지 불러서 함께 식사를 하곤 하는데 식사를 할 때마다 별로 드시는 것 없이도 흐뭇하게 아이들을 보시는 어머님을 본다.
오늘 병원을 다녀오신 뒤에 어머님과 둘째 주호가 모처럼 같이 식사를 했다. 회를 먹고 싶다는 손주의 청을 들어주려 횟집에 가신 어머님은 당신 몫을 모두 손주에게 주시고 만면에 미소를 띠신 채 손주를 바라만 보신다. 공부하느라 바쁘다는 핑계로 할머니를 자주 찾아뵙지 못했던 손주가, 어머님 눈에는 고생을 많이 하는 아직 한참 어린 꼬맹이이다. 용돈까지 손수 챙겨 주시며 쉬엄쉬엄 하라고 토닥이신다.
어머님을 볼 때마다 생각한다. 내가 과연 저런 시어머니가 될 수 있을까? 며느리에게 나도 저렇게 무한 사랑을 베풀면서 단 한 마디도 잔소리를 하지 않는 마냥 따뜻한 시어머니가 될 수 있을까?
아직 자신이 없으니 어머님 곁에서 더 많이 배워야 한다. 올해 84세가 되신 어머님. 그 곁의 아직 마냥 서툴고 눈치도 부족한 맏며느리는 한참 배울 게 많다. 손주를 바라보시는 어머님의 너그러운 모습처럼 나도 우리 아들, 며느리에게 사랑만 베풀며 살 수 있다면 충분히 아름다운 삶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