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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는 사랑을 싣고

내가 되고 싶은 사람

by 그대로 동행

띵똥

이른 아침 시간에 누군가 싶어 인터폰 카메라로 보니 낯익은 얼굴이 서있었다. 502호 아저씨.

노부부 단 둘이 사시는데 아저씨는 과거에 교회 목사님으로 은퇴하셨다고 들었었다. 엘리베이터나 길에서 마주칠 때마다 인사를 건네는 정도의 사이인데 웬일이실까?


문을 열자 아저씨가 큰 비닐봉지를 내 앞에 내미셨다. 싱싱한 딸기 한 팩.

혹시 잘못 보내시는 게 아닌가 싶어 무슨 일인지 조심스레 물으니 아저씨가 웃으며 대답하셨다.

"어제 저희 집 공사로 좀 시끄러운 공사 소음이 났지요? 폐를 끼쳐서 미안하다고 사과드리려 가져왔어요. 아이들과 맛있게 드세요."


순간 어제 일이 기억을 스쳤다. 오후에 잠깐 날카로운 공사소리가 들려서 이사오느라 한 달째 집을 고치는 602호에서 나는 소리려니 했었다. 그런데 의외로 502호에서 나는 소리였다며 아저씨가 딸기를 갖고 오신 거였다. 나는 겸연쩍게 얼굴을 붉히며 "에잇, 그 정도 소리로 뭘 이런 것까지 주세요. 저희는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는데....."

1201호인 우리집에서 502호 소음이 얼마나 크게 들렸다고 이렇게 딸기까지 주냐고 사양했건만, 아저씨는 한사코 괜찮다며 딸기를 건네고 가셨다.


마침 수일 전부터 아이들에게 딸기를 먹이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터였다. 아저씨가 건네주신 딸기를 보니 그간의 내 마음을 들킨 것 같아 속으로 뜨끔했다.

그날 저녁, 아이들과 함께 향긋한 딸기를 나눠 먹으며 502호의 노부부를 생각했다.


유난히 길고 무더웠던 지난여름, 502호 노부부가 새벽마다 아파트 화단을 가꾸시던 모습이 생각났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아 방치되다시피 했던 화단을 매일 새벽 노부부가 땀을 뻘뻘 흘리며 흙을 파고 가꾸셨다.

그 길을 지날 때 "관리사무소에서 부탁하신 거예요?"라고 묻자 "우리가 좋아서 그냥 우리 돈 들여서 하는 일이에요. 이렇게 잘 가꿔서 꽃들이 피면 보기 좋잖아요."라면서 송골송골 땀이 맺힌 얼굴로 환히 웃으셨다.


노부부의 수고는 눈부신 결실을 맺어서 해에 아름다운 튤립을 실컷 구경할 수 있었다.


붉은 벽돌을 정갈하게 놓아 정리한 화단에서 노부부가 정성껏 가꾼 튤립이 만개한 날, 사람들은 그 길을 지날 때마다 낮은 탄성을 지르며 감탄했다. 그때마다 나는 수개월간 남몰래 새벽마다 수고했던 노부부의 모습을 떠올렸다.


요즘 유례없이 크게 우리나라를 휩쓸고 간 산불, 극단의 대립으로 민생은 아랑곳하지 않고 정쟁만 일삼는 정치인들, 해외에서 밀려드는 통상압력 등으로 힘든 나라 안팎의 여건.

나를 힘들게 하는 가정의 어려움으로 어깨가 움츠러들고 우울했다.


그러나 노부부가 건네준 딸기, 눈부신 자태를 뽐냈던 튤립을 떠올리며 우리를 힘들게 하는 각종 여건에도 불구하고 이런 분들의 수고로 세상은 본연의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돌아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눈이 많이 내렸던 지난겨울, 새벽에 교회에서 기도하고 나오는데 남몰래 눈이 치워져 있는 길을 보았다.

모두 잠든 밤, 홀로 나와 눈을 치워준 누군가의 수고로 미끄러질 염려 없이 인도를 걸으며 마음속으로 감사하다는 말을 되뇌었다.

세상에는 여전히 우리를 힘들고 지치고 분노하게 하는 일들이 많다. 그럼에도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홀로 피로를 무릅쓰고 눈을 치워준 이의 수고, 소소한 공사 소음을 미안해 하며 딸기를 챙겨 온 노부부의 배려, 무더위 속에 남몰래 화단을 가꾸고 꽃을 피운 그 사랑이 있기에 세상은 여전히 살만 하다.


나도 딸기 한 팩의 사랑을 전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502호 노부부, 눈을 치워준 사람처럼 우리 시대의 나무를 심는 부피에 노인이 되고 싶어졌다.


참으로 세상을 변화시키고 이 세계를 아름답게 바꾸어 놓는 사람은 권력이나 부나 명성을 누리는 사람들이 아니라 남을 위해 소리 없이 일하는 사람, 침묵 속에서 실천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우쳐 준다. ㅡ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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