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준을 바꾸다
얼마 전 작은 시누이가 어머님 집에 와서 오랜만에 함께 식사했다. 어머님은 우리 집에서 불과 도보 10분 거리에 사시지만 작은 시누이는 대중교통으로 2시간은 족히 걸리는 서울 마포에 살기에 모처럼의 만남이 반가웠다.
어머님도 우리 권유로 용인에 이사 오시기 전에는 마포구에 오래 사셨었다.
그러나 우리 집에서 시댁이 멀리 떨어져 있다 보니 맏아들인 우리 집이 부모님을 돌보는 데에 한계가 있어 용인으로 이사 오시도록 수년간 권유했다.
마침 아파트 1층인 시댁에 밤사이 도둑이 들어온 일이 있어 아버님이 과감하게 이사를 결정하셨다.
이후 6년째 시댁 가까이 살아왔다.
그 사이 아버님은 돌아가셨고, 홀로 남아 외로워하시는 어머님을 위해 남편이 시어머니와 함께 살게 되었다.
시누이와 식사를 하면서 나는 한껏 뿌듯해하며 말했다.
"어머님이 이곳에 이사 오셔서 언니 집과 많이 멀어졌지만 그래도 이사 오시길 정말 잘하셨어요. 이곳에 계시니 남편이 함께 살고, 또 손주들이 가까이 있으니 얼마나 좋으시겠어요. 무슨 일이 생겨도 우리가 바로 대처할 수 있고, 집 가까이 노인 복지관도 있어서 어머님이 이전보다 더 행복해지신 것 같아요."
그때는 몰랐다.
나의 말에 아무 반응이 없으셨던 어머님의 표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저 어머님이 귀가 잘 안 들리시기에 그러려니 넘어갔다.
그로부터 수일 후, 남편이 나에게 넌지시 말했다.
"누나가 엄마한테 여기 이사 온 뒤 정말 행복하냐고 물었더니 엄마가 뭐라 하셨는지 알아?"
나는 뭐 그런 하나마나한 질문을 하냐는 듯한 표정으로 남편을 쳐다봤다.
그러나 나의 예상을 깨는 남편의 말.
"'낫긴.. 이전 서울 살 때가 훨씬 낫지. 무슨 소리야?"라고 하셨대."
남편의 한 마디에 뒤통수를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느꼈다. 지금까지 6년 동안 우리와 가까이 사시면서 분명, 서울에 사실 때보다 덜 외롭고 행복하실 거라 생각했던 건 순전히 며느리인 나만의 착각이었나.
처음에는 미안했다. 가까이 살면서도 바쁘다는 핑계로 자주 못 가 뵙고, 도리어 가끔 반찬을 얻어먹는 내 모습이. 손주들도 바빠 자주 찾아뵙지 못하고 어쩌다 갈 때마다 도리어 할머니께 용돈을 받아왔기에 어머님이 부담스러우실 수도 있었겠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간사한지 시간이 흐를수록 서운함이 짙어지기 시작했다. 이사 오자마자 어머님이 신장병으로 입원하셨을 때, 매일 왕복 1시간 이상 걸려 어머님 병원에 들러 돌봤던 일. 어머님 병원에 매번 동행했던 일, 시댁에 들러 챙겨 드렸던 자잘한 일 등 며느리 노릇 한다고 애썼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어머님은 이런 나를 알아주지 않고 아직도 서울 생활을 그리워하실까 하는 섭섭함이 스멀스멀 밀려왔다.
남편에게 이런 나의 마음을 얘기하자 그는 대수롭지 않게 "에잇, 마음에 담을 필요 없어. 그건 서울 살 때 여러모로 편리했다는 뜻일 뿐이야."라고 말하며 지나가 버렸다.
그러나 어머님을 뵐 때마다 내심 꺼끌꺼끌해진 나의 감정이 일부러 말을 아끼게 만들었다.
그런 나의 생각이 한 번에 무너진 계기가 있었다.
그날은 내 생일 전날 밤이었다. 남편과 함께 길을 걷는데 나에게 툭 돈 봉투를 내밀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빤히 쳐다보니 "엄마가 당신 생일이라고 주래. 그런데 이번에는 좀 두툼하네."
남편은 나에게 주려다 말고 봉투를 도로 가져가 지폐를 세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눈에 불이 켜지면서 외치길 "웬일.... 50만 원이나 주셨어. 엄마 무리하셨네."
결혼 후 20여 년간 어머님은 며느리의 생일을 한 해도 안 거르고 챙겨 주셨다. 매년 뻣뻣한 새 돈으로 20만 원 용돈을 챙겨 주시며 가족들과 맛난 걸 사 먹으라 하셨다. 그런데 올해는 그 액수가 배 이상 늘었다.
당혹스러움과 미안함으로 나는 봉투만 쳐다보며 할 말을 잃은 채 서있었다.
수일 후, 어머님을 뵌 날, 생일 선물에 대해 말씀드렸다.
"어머님, 뭔 돈을 그리 많이 주셨어요. 죄송하게...."
그러자 어머님이 고개 들어 나를 보시며 환히 웃으셨다.
"네가 요즘 많이 힘들어 보여서... 그저 널 위로해 주고 싶어 그런 거니 마음 쓰지 마라. "
어머님의 말이 끝나자마자 나는 순식간에 눈자위가 벌게짐을 느꼈다. 그간 속으로만 궁시렁거리며 원망했던 내 모습이 부끄러워 차마 어머님의 눈을 바라보지 못했다.
'어머님, 죄송해요. 이런 어머님 마음도 모르고 저 한동안 원망했어요. '
어머님의 마음도 모른 채 내 생각에만 빠져 있던 모습이 부끄러워 한동안 고개를 들지 못했다.
한 편으로는 나의 힘겨움을 어머님 앞에서 적나라하게 들킨 것 같아 죄송하기도 했다.
이제 마음 편히 자식들이 잘된 모습을 즐기셔야 하는데, 괜히 우리 집 부근으로 이사 오셔서 몰라도 될 것들을 너무 많이 알게 되셨구나.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동상이몽이라고 속상해했는데 지금 보니 일방적인 나만의 오해였던 것 같다.
대단치도 않은 며느리 노릇에 대해 생색만 잔뜩 올라왔던 내 좁쌀만 한 마음이 부끄럽고 민망해졌다.
실상 내가 받은 사랑이 훨씬 큰데 그깟 한 마디로
고마워했던 마음이 와르르 무너졌었다.
말 한마디에도 무너지는 아슬아슬하고 취약한 고부관계. 이래서 며느리는 딸이 될 수 없나 보다. 나는 그 한계를 인정하기로 했다.
그리고 우리의 관계 기준을 더 이상 행복이 아닌 사랑에 두기로 했다. 행복은 주관적이고 찰라이나 사랑은 영원히 남으니까.
기준을 바꾸면 삶이 편안해진다.
이렇게 우리는 서서히 동상동몽이 되어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