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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대로 동행 Apr 26. 2022

딸 같은 아들? 아들 같은 딸?

덤벼라 사춘기,갱년기가 나가신다

애들이 제법 머리가 굵어진 요즘은 거의 없는 일이지만, 불과 작년까지도 가끔 아이들 셋을 데리고 외출이나 외식을 하곤 했다.

 그럴 때면 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묻는 질문 중의 하나가 '이 세 아들 중에서 누가 딸 같은 아들이냐'는 것이다.


그 질문은 많은 것을 함의하고 있다.

누가 엄마에게 자상한 아들인지, 마음 씀씀이가 딸같이 세심하고 따뜻한지  등을 궁금해하는 것이리라.

어쨌건 여기서 딸 같은 아들이라는 건 결코 나쁜 의미가 아닌 엄마에게 의지가 되는 살갑고, 자상하고 이해심이 깊은 아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질문을 받을 때면 나는 주저 없이 둘째 아들 주호를 꼽곤 했다. 세 아들 중 유일하게 나와 혈액형이 A형으로 같을뿐더러 외모도 나와 가장 많이 흡사하다. 주호는 어려서부터 애교도 많고 성격도 유순하며 엄마의 말을 고분고분 잘 들어주는 아들이다. 물론 목소리 변하고 사춘기가 오면서 사뭇 달라지긴 했지만 그래도 세 아들 중 엄마의 말에 가장 공감해주고 수다를 떨 때도 죽이 제일 잘 맞는 아들이다.     


사람들의 질문에 대답을 한 뒤로 나는 집에 와서 곰곰이 생각에 잠긴다.

왜 엄마에게 자상한 아들은 딸 같은 아들이라고 할까? 그것은 딸이 그만큼 아들보다 낫다는 선입견을 이미 내재한 말 아닌가?

딸이 아들보다 더 자상하고, 엄마에게 친절할 거라는 전제가 깔린 그 말이 마치 아들을 그보다 못한 존재로 보는 시각이 들어있는 것 같아 질문한 사람의 의도는 당연히 아니겠지만 가끔씩 나는 속이 상하곤 했다.    

 

그러면 반대로 아들 같은 딸은 어떨까?

올해 고 3인 큰애 또래의 딸을 키우는 친한 집사님과 아이들 얘기를 나눴다. 서로 주거니 받거니 아이들과의 일상을 나누면서 부쩍 자기중심적이고 반항이 심해진 아이들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나는 같은 아들을 키우는 엄마들과는 그런 대화를 스스럼없이 편하게 나눠 왔지만 솔직히 딸을 키우는 엄마와 그런 대화를 하는 게 사뭇 낯설었다. 그래서 넌지시 물었다.

“ 그래도 집사님은 딸이잖아. 아무래도 딸은 그러다가도 와서 안기고, 낫지 않아?”

그러자 집사님이 손사래 치면서 왈

말도 마요. 완전 아들 같은 딸이라니까. 딸이면 뭐해. 아들 같은데...”


헉, 아들 같은 딸?

그렇다.

딸 같은 아들과 아들 같은 딸 사이에는 엄청난 간극이 존재한다.

아들 같은 딸은 한 마디로 아들처럼 키우기 힘들고, 자기 고집 세고, 엄마 속을 썩이는 딸의 모습을 함축한 말이다.


그래서 나는 볼멘소리를 했다.

“아들 같은 딸이 어때서? 딸이 아들 같으면 듬직하고 좋겠구먼.”

그러나 이것은 그저 나의 외마디 비명에 지나지 않음을 나도 안다. 상식적으로 아들 같은 딸이라고 할 때, 그것이 그 딸의 듬직함을 말하는 것이겠는가? 그저 아들 키우는 만큼 힘든 딸을 가리키는 것이지.     


내가 아들을 한두 명  데리고 다닐 때는 누구도 나에게 눈길을 주지 않는다. 그러나 세 명의 아들을 동시에 거느리고 다닐 때 나는 흡사 연예인이 받을 법한 지대한 관심의 대상이 된다.

사람들이 흘낏거리고 쳐다보는 건 물론이고 대놓고 나의 면전에서 "엄마, 힘들어서 어떡해. “ 하거나 심지어 애국자라고 치켜세우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그중의 가장 충격적인 말은'' 에휴, 저기딸이 하나라도 섞여 있어야지. 죄다 아들이어서" 어떡해?" 하는 것이다.

그럼 나는 태연하게 "성별이 통일되어서 더 좋은걸요.”하고 웃어넘긴다.

그러면 여지없이 나에게 오는 말

 "하긴, 저 중에 딸 같은 아들 하나쯤은 있겠지. “

그렇다. 아들만 있는 엄마는 딸 같은 아들이라도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눈에 딸이 훨씬 나으니까. 특히 같은 여자인 엄마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어쩌랴. 사람들이 그토록 좋아하는 그 딸, 나는 한 명도 없다. 그래서 때론 나도 외로울 때가 있다.

특히 갱년기가 오면서 여자로서 함께 대화를 나눌 우리 집 식구가 한 명도 없다는 게 가끔 쓸쓸하다. 딸의 팔짱을 끼고 콧노래 흥얼거리며 함께 옷을 사거나,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을 보면 나도 부러워 죽겠다.


’ 우리 엄마‘ 하면서 엄마 품에 폭 안기고 애교 떠는 그런 딸 나도 있으면 좋겠다. 아들은 엄마가 아파 죽겠다고 누워 있어도 자기 밥 챙겨 달라 조르고, 가끔 얼굴을 마주쳐도 단답형 대답만 하고 사라진다.


대신에 아들은 옷사달라, 신발 사달라 투정이 거의 없고, 잔소리를 퍼부어도 잠시 뒤면 까먹어서 뒤끝이 없다. 엄마가 아무리 큰 소리로 화를 내도 자기 듣고 싶은 말들만 들은 뒤 다 걸러내서 특유의 무표정한 모습으로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리면 그만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감정 소모 없이 쿨하게 키울 수 있는 아들이 얼마나 편한가. 물론 이것은 그저 나 자신을 향한 소박한 위로에 지나지 않는다.


어쨌건 나에게는 딸 같은 아들이 아닌 그저 아들다운 아들들이다. 세상에 자식도 다 나름이지, 거기에 꼭 딸과 아들 여부가 무어 그리 중요하겠는가.


나는 우리 아이들이 듬직하고 신실하게 자기 인생을 올곧게 살면서 이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아름다운 삶을 살면 된다.

---같은 아들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그러니 이제 저에게 그런 질문은 그만해주세요. 아들다운 아들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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