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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대로 동행 Sep 26. 2022

황금티켓을 쫓는 아이들

수레바퀴 아래서를 읽고

이 소년은 한창 피어오르는 꽃다운 나이에 갑자기 꺾여 즐거운 인생의 행로에서 억지로 벗어난 듯한 모습이었다. 피곤과 외로운 슬픔에 지친 한스의 아버지도 미소 짓는 무언의 환멸 속으로 빠져들었다.

-수레바퀴 아래서 중-


며칠 전 신문에 OECD에서 시행한 한국의 경제보고서에 의하면 우리나라는 전 국민적으로 지나치게 황금티켓에 집중해서 경제적 역동성과 성장에 제약이 있다는 기사가 나왔다.

기사에 따르면 황금티켓은 명문대 졸업후 대기업, 공기업 입사 내지 공무원, 전문직 진출을 가리키는 것으로 누구나 원하지만 상대적으로 얻기는 힘든 티켓을 의미한다.   이로 인해 결혼 기피, 저출산 등이 심화되어 경제발전에 약영향을 끼친다고 한다.


입시를 앞둔 고3을 포함해 아들 셋을 키우면서 이 기사에 깊은 수긍이 갔다. 요새 아이들이 재수를 하는 이유 중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원하는  명문대나 인 서울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런 재수 비용이 사회적 부담으로 전가되는 건 당연하다. 이번에 입시 경쟁률을 보니 이과의 우등생들이 몰리는 의약대, 치대 등은 수시에서 높은 경쟁률을 기록했는데 한 대학의 논술전형 경쟁률은 600대 1 이상을 육박할 정도라니 특정 과와 학교에 집중된 입시 과열 현상이 정말 심각한 수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과연 이 황금티켓은 아이들의 삶과 행복을 보장해 주는 만능 티켓일까? 


수레바퀴 아래서는 헤르만 헤세의 자전적 소설로 19세기 초 독일 남부 시골 을을 배경으로 우등생으로 촉망받던 소년 한스가 사람들의 기대를 등에 업고 당시 중인 계급의 성공 코스였던 신학 기숙학교에 들어가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성실한 우등생이었던 한스는 학교에서 하일러라는 감수성 풍부하고 자유분방한 친구를 만나면서 깊은 영향을 받고 급기야 그 친구와의 우정을 유지하기 위해 공부를 소홀히 하다가 선생님과 아이들로부터 외면을 받는다.     하일러는 결국 한스의 산책에 동행한 것, 무단 외출한 것 등으로 인해 학교에서 무거운 처벌을 받고 퇴학을 당한다.


절친한 친구 하일러가 떠난 뒤 한스는 극심한 스트레스를 겪지만 , 한 번 궤도에서 이탈한 한스를 선생님과 친구들은 한결같이 냉대할 따름이다.


결국 건강상의 이유로 학교를 자퇴하고 집으로 돌아온 한스를 기다리는 건 따뜻한 환영이 아니라 겨우 그것뿐이 안되느냐는 사람들의 멸시와 냉대이다.  심지어 위로해 줄 엄마조차 없는 한스에게 아빠는 따뜻한 울타리가 되어주긴 커녕 빨리 기계공을 시킬 궁리만 한다.


결국 누구도 한스에게 원하는 꿈이 뭐냐고 묻지 않는다.   한스는 한 번도 자신이 진정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고민조차 해보지 못하고 어른들의 기대에 따라 수동적으로만 산다.  그리고 기계공 실습을 하다 쉬는 날 친구들과 거하게 술을 마신 뒤 강가에서 시체로 발견된다. 자살인지, 우연한 사고사인지는 독자의 상상에 맡겨진다.


한스가 겪었던 100여 년 전 독일의 지독한 입시경쟁, 공부 압박은 지금 현재 대한민국에서도 변함없이 진행 중이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네가 잘하는 것, 원하는 것을 하면서 살라고 하지만 결국 아이들의 희망은 쉽게 무시된다.  

그리고 모두가 가는 코스를  저항 없이 따라가며 수레바퀴 아래 깔리지 말라고 조언한다.


학교와 학원을 도는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며 이 아이들이 얼마나 자신과 삶에 대해 생각할 여유를 가질 수 있을까?   스마트폰과 미디어에 심각하게 의존하는 오늘날의 아이들이 대부분 유사한 꿈을 꾸는 이 현실이 과연 정상적이고 건강한 사회라고 할 수 있을까?


이 책을 덮으며 나는 오늘날의 대한민국, 우리 아이들의 오늘을 본다.  언제쯤 이 아이들이 좀 더 자유롭게 자기만의 꿈을 꾸며 공부할 날이 올까?


 우리 때보다 더 지독하고 힘겨운 경쟁에 내몰린 아이들을 보면서 오늘날의 한스들을 보는 것만 같다.   황금 티켓이 아닌 자신의 꿈을 좇아서 소신껏 인생을 개척하는 아이들이 많아지고 그런 아이들을 응원하는 세상을 꿈꿔본다.

나부터 아이들의 지친 어깨를 보듬어 주고, 황금티켓이 아닌  수레바퀴를 끌고  가라고 손 내밀어 주는 어른이 되고 싶다.


왜 그는 가장 감수성이 예민하고 상처받기 쉬운 소년 시절에 매일 밤늦게까지 공부를 해야만 했는가?  
- - 왜 심신을 피곤하게 만들 뿐인 하찮은 명예심을 부추겨 그에게 저속하고 공허한 이상을 심어주었는가?
 왜 시험이 끝난 뒤에도 응당 쉬어야 할 휴식조차 허락하지 않았는가?  
이제 지칠 대로 지친 나머지 길가에 쓰러진 이 망아지는 아무 쓸모도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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