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대로 동행 Nov 11. 2022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합니다

멋진 신세계를 읽고

영국의 소설가 겸 비평가인 올더스 헉슬리가 1932년에 발표한 소설 멋진 신세계는 조지 오웰의 1984와 함께 암울한 미래사회를 그린 대표적인 디스토피아 소설이다.    

  

과학 지식을 총망라해서 천재적인 작품을 남긴 올더스 헉슬리는 소설 속의 인물들을 통해 과학 문명의 발달이 인간과 삶을 어떻게 변화시킬지 정교하게 예견한다.     


하나의 국가로 통합된 가상의 미래 사회에서 인간은 문명사회의 안정을 위해  5개의 계급, 알파-베타-감마-델타-엡실론 계급으로 나눠져 인공부화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지식계급인 알파와 베타는 신체, 지적 조건이 우월한 반면, 제일 하급의 노동 계층인 엡실론은 유전자 조작을 통해 태어날 때부터 평균 이하의 지능과 신체조건을 지닌다.      


이렇게 대량 생산된 인간들은 ‘육아보육실:

신 파블로식 조건반사 양육실’에서 계급의식, 조건반사 교육법과 수면 시 교육법 등으로 철저하게 사회의 안정을 위한 계급의식과 관념을 가진 사람으로 국가에 의해 양육된다.      


만인은 만인의 소유’라는 기치 아래에서 이들에게 가족이나, 친구 등의 인간관계는 철저하게 배제되고, 오로지 대량 상품 경제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써만 존재한다.     


소설의 주인공  버나드 마르크스는 상층 계급이나 열등한 육체를 지녔고, 그의 친구인 헬름홀츠는 우수한 지적 능력을 지녔으나 차츰 반사회적 성향을 보인다.  버나드는 같은 상류층의 아름다운 여인 레니나와 야만인 보호구역으로 여행을 가서 문명의 혜택을 거부하고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구경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문명사회에서 조건반사 양육소 소장과 함께 여행을 갔다가 실종되었던 여인 린다와 그녀가 낳은 아들 존을 만난다.

존은 문명사회에 대한 호기심과 레니나에 대한 연정으로  린다와 함께 버나드를 따라  문명사회로 오고, 순식간에 문명사회를 흔드는 유명인사가 된다.      


야만인 보호구역에 살 때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심취해 살던 존은 그토록 기대했던 문명사회 야만성을 목격한다. 사람들은 주어진 부품으서의 삶에 순응하면서 어려울 때마다 소마라는 마약에 의존해 감정을 다스린다.


모든 관계가 해체된 사회에서 인간은 없고 문명의 이기만 존재하는 부조리를 체험한 존은 문명세계의 사람들이 결국 노예 집단임을 깨닫고 그들에게 자유를 주기 위해 배급을 방해하다 체포된다. 그리고 외진 곳으로 스스로 자원해서 떠나나 그곳에서도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자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 작품의 제목은 셰익스피어의 마지막 희곡 ‘템페스트’ 속 미란다의 대사에서 따왔다.      

작가는 자본주의와 과학 문명에 대한 반기를 들기 위해 소설의 주인공 이름을 칼 마르크스와 생리학자 헬름홀츠에서 따왔다.

또한 소설 곳곳에서 셰익스피어의 희곡 구절을 인용해 문명사회의 허상을 적나라하게 고발한다.


작품에서 헬름홀츠는

우리의 세계는 오셀로의 세계와 같지 않기 때문이야. (중략) 세계는 이제 안정된 세계야. 인간들은 행복해. 그들은 원하는 것을 얻고 있어. 얻을 수 없는 것을 원하지도 않아.(중략) 뭔가가 잘못되면 소마가 있지.
    

라고 자부한다.

과연 과학 문명의 발달로 인간을 철저하게 부품화 한 세계가  안정되고 멋진 신세계일까?


책을 읽으며 나는 그들의 심리적 안정과 위험으로부터의 도피를 위해 쓰이는 소마가 오늘날 우리 삶과 의식을 지배한  스마트폰, 미디어와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 세계를 통일해서 다스리는 총통은 오늘날 전 세계를 고객화 한 구글과 같은 테크 기업의 수장, 그들이 경배하는 포드 신은 자본주의가 만들어낸 물질(돈)이 아닐까?     


90년 전에 쓰인 소설이 오늘날 읽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도리어 현대의 모습과 정확하게 부합되는 것에 대해 가슴이 패이는  절절한 아픔을 느꼈다.      


"하지만 저는 안락을 원치 않습니다. 저는 신을 원합니다.  시와 진정한 위험과 자유와 선을 원합니다. 저는 죄를 원합니다."

"그렇다면  자네는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하는 거지?" 총통이 물었다.

"네, 저는 불행해질 권리를 요구합니다."


불행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들이 실제로는 우리가 주체적인, 인간적인 삶을 살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A brave new world에 사는 우리에게 헉슬리가 질문하는 듯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황금티켓을 쫓는 아이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