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에 왔다면 이런 모습이었을까?
뉴올리언스를 가기로 결정하고 유일하게 미리 찾아본 곳은 재즈 클럽 리스트. 그중에서도 뉴올리언스 재즈의 성지라 불리는 프리저베이션 홀(Preservation Hall)이 가장 궁금했다. 미리 예약을 하면 좌석을 확보할 수 있지만, 난 언제 시간이 날 지 모르는 여행자. 그냥 되는대로, 내가 되는 날에 가서 줄을 서기로 했다.
프리저베이션 홀은 뉴올리언스 재즈의 산증인과도 같은 장소. 1961년, 뉴올리언스 재즈를 기념하기 위해 문을 열었다. 프리저베이션(preservation)이라는 단어 뜻대로 뉴올리언스 재즈를 '보존'하고 '지키기' 위한 장소다.
preservation
1. (원래 상태・좋은 상태를 유지하도록 하는) 보존
2. (잃지 않도록) 지키기, 보전
3. 보존(된 정도)
프렌치 쿼터(French Quarter)의 버번 스트리트(Bourbon Street) 근처, 피터 스트리트(Peter Street)에 위치한 이곳은 매일 저녁 8시부터 10시까지 총 세 타임의 공연이 열리고, 공연 시간은 회당 45분씩, 가끔 스페셜 이벤트나 페스티벌 기간엔 6시에도 공연을 한다. (*미리 홈페이지에서 찾아보는 것이 좋다) 보통 다른 재즈 클럽들은 입장료 없이 음료값을 내고 공연을 즐길 수 있지만, 이곳은 다르다. 당일 스탠딩 20$, 좌석 예약은 35~45$ 정도, 그 어떤 음료도 팔지 않는다. 원하면 밖에서 사 오는 건 괜찮다고 했다. 오로지 공연만을 보기 위한 장소. 그래서 더 마음이 끌렸다.
버번 스트리트에서 재즈 공연을 본 어느 날, 왠지 집에 가기 아쉬워서 9시 타임 공연을 보기 위해 프리저베이션 홀로 향했다. 그때 시각은 8시 40분쯤. 공연장 입구에 줄이 길게 늘어서있다. 8시 45분이 되고 8시 타임 공연을 봤던 사람들이 빠져나왔다. 들어갈 수 있을까 싶었지만 줄은 내 앞에서 끊겼고, 지금부터 기다리면 10시 타임 공연은 볼 수 있을 거라 했다. 앞으로 한 시간을 더 기다려야 하다니. 또 기회가 있겠지 싶어서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또 다음날, 역시나 한 시간을 넘게 기다려야 볼 수 있단다. 혹시나 예약 가능한 날이 있나 물어봤더니 지금부터 3주 간은 풀 예약이란다. 역시 재즈의 성지답다. 그렇다면 아예 10시 가까이 가보는 건 어떨까 싶어서 그다음 날은 9시 30분 즈음 공연장으로 향했다. 다행히도 9시 타임 기다릴 때보다 줄이 짧다. 9시 45분이 조금 넘으니 9시 공연을 봤던 사람들이 빠져나왔고, 안전하게 공연장으로 들어갔다. Lucky! 다.
공연장은 생각보다도 작았다. 스탠딩까지 합쳐서 객석은 눈짐작으로 5-60명 정도 되어 보였다. (아마 스탠딩이 꽉 차면 70명까지도 되어 보인다) 1961년에 생긴 모습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듯한 낡은 나무 바닥과 벽에 걸려 있는 액자에 눈길이 갔다. 무대와 좌석 첫 줄까지의 거리는 1m가 채 안됐다. 밴드는 코넷(이자 보컬), 트롬본, 클라리넷, 드럼, 베이스, 피아노까지 총 6명으로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뉴올리언스에서 재즈 공연을 보면서 가장 좋았던 점 중 하나는 어르신들로 구성된 밴드가 많다는 점이다. 각자 어딘가에서 젊은 시절을 보내고 노년을 이곳에서 보내려고 온 걸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여유로우면서도 편안해 보였다. 나는 친구와 밴드를 가리키며 '저분은 젊었을 때 여자 꽤나 많았을 거 같지?' 등의 말도 안 되는 평가를 해보기도 했다.
* 코넷(cornet) : 모양이 트럼펫과 흡사하고 음색도 비슷하다. 트럼펫과 같은 화려함은 없으나 친밀감이 가는 음질을 지녔으며 초보자가 다루기는 트럼펫보다 쉽다. (출처: 두산백과)
NO AMP, NO MIC
공연이 시작했다. 숨죽인다는 표현을 이럴 때 써야 할까. 앰프도 없고 마이크도 없는 공연장은 처음이다. 보통 아주 작게라도 노래 부르기 위해선 마이크를 쓰기 마련인데 그래도 이 많은 사람들이 보는데 들릴까 싶었지만 잘 들렸다. 다만 잘 듣기 위해 더 숨죽이게 되었지만, 그 기분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종류의 벅참이었다. 행복했다. 밴드 마스터는 드러머. 보컬은 코넷 연주자였다. (이곳의 뮤지션들은 관악기를 하면서 보컬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할아버지들의 하모니는 정말 아름다웠고, 아름다웠다. 아름답다는 말을 수도 없이 반복해도 모자랄 정도로 연주가 로맨틱했다. 숨죽임과 동시에 시간도 함께 멈춰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45분은 너무 빨리 지나갔다.
Preservation Hall Jazz Band
홀의 이름을 딴 재즈밴드는 1963년부터 활동 중이다. 물론 멤버는 시대를 거치며 바뀌었고, 홀의 정신을 계승하며 뉴올리언스 재즈를 보존하고 지키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밴드의 이름으로 앨범은 계속 발매되고 있는데 가장 최근에 발매된 [So It Is] 역시 음악도 좋고 커버도 예뻐서 사 왔다. 이곳의 CD들은 보통 20$ 정도다. 그리고 Jamie Wight's의 코넷 연주와 목소리에 매료되어 그분의 솔로 앨범 [Memories]도 샀다. (앨범을 들으며 글을 보완 중인데 내지에 P.S라며 적혀 있는 문구가 인상적이다. "I hope to keep busy enough to compile another album in about 25 years.")
프리저베이션 홀의 여운은 한국에 와서도 계속되고 있다.
휴대전화에 티켓을 넣어서 다닐 정도니까.
숨을 꾹 참으면 1960년대 그곳으로 돌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
젊은 시절의 그들을 만나고 에너지를 느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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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르신들로 구성된 밴드인 점을 이야기하다 보니 홀의 역사가 떠올랐다. 프리저베이션 홀은 Jaffes 부부가 1960년 신혼여행을 뉴올리언스로 택하면서 시작되었다. 잭슨 스퀘어(Jackson Square) 부근 래리 갤러리(Larry 's Gallery)에서 우연히 재즈 공연을 보았고, 그들의 잼 세션(Jam session)에 반했다고 한다. 그 당시 연주를 했던 뮤지션들은 모두 노인들이었고, 코넷 연주자이자 재즈의 확립자라 불리는 버디 볼든(Buddy Bolden)과 함께 했거나, 재즈의 시초를 함께 만들 어나던 사람들이었다. 부부는 공연에 큰 감명을 받았고, 아예 뉴올리언스로 이주해 이듬해 홀을 세웠다. 그리고 1963년, 프리저베이션 홀 재즈 밴드(Preservation Hall Jazz Band)를 만들었다. 그리고 여전히 같은 이름으로 밴드는 지속되고 있다. (출처: 프리저베이션 홀 공식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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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올리언스의 대표 칵테일 허리케인이 맛있는 집은 프리저베이션 홀 바로 옆 펫 오브라이언스(Pat O'Brien's) 바. 기다리며 한 잔 하는 것도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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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여담. 난 공연을 보고 나와서까지도 Presentation Hall인 줄 알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내 눈엔 preservation보다 presentation이 익숙했나 보다. 홀 앞에 줄 서 있던 어느 날, 한 외국인이 길게 늘어진 줄을 보고 나에게 여기 뭔데 이렇게 줄 서있냐고 물어서 "여기 프레젠테이션 홀이라고 아주 유명한 재즈 공연장이야."라고 답했더니 "여기서 무슨 프레젠테이션을 해?"라고 다시 질문했던 기억이 난다. 아주 부끄럽다. 이래 놓고 <재즈도 모르면서 뉴올리언스> 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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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구나.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