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슬픔은 이유도 없이

영화 ‘프랭크’(레니 에이브러햄슨, 2014)

by 권등대

(영화 리뷰에는 항상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프랭크는 가면을 쓰고 산다. 밥을 먹을 때도, 샤워를 할 때도, 심지어 잘 때도 가면을 쓴 채다. 관객과 존은 프랭크가 모종의 이유로 자신의 얼굴을 숨기기 위해 가면을 쓴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프랭크는 “난 뭐든 숨기는 게 싫어. 감출 게 뭐 있어? 안 그래?”라고 천연스럽게 말한다. 즉 프랭크는 자신의 얼굴을 숨기기 위해 가면을 쓰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가 가면을 쓰는 이유는 무엇인가. 존이 물었다. 프랭크는 가면을 쓰는 것이 이상하게 보이냐며, 맨얼굴도 이상하긴 마찬가지라면서 맨얼굴을 기괴하게 묘사한다. 프랭크가 가면을 쓰는 이유는 더욱 미궁으로 빠진다. 사람의 얼굴을 혐오하는가, 그래서 가면으로 대신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저 가면을 너무 좋아하는 것인가. 정확한 답을 내리기는 어렵다. 그러나 관객과 존은 프랭크의 가면에는 어떤 사연이 있을 것이고 그 사연이 프랭크의 천재적 음악성과 어떻게든 관련이 있을 거라고 알게 모르게 짐작하게 된다.


프랭크의 비밀은 머지않아 드러나게 된다. 프랭크는 부담감으로 인해 큰 축제를 망쳐버리고 존과 한 모텔에서 생활하게 되는데 어느 날 화가 난 존은 프랭크에게 억지로 가면을 벗으라고 소리치며 몸싸움을 벌인다. 스트레스로 폭주한 프랭크는 모텔 문을 박차고 뛰어나가다가 도로에서 차에 치이게 된다. 부리나케 달려간 존이 목격한 것은 프랭크의 부서진 가면뿐. 프랭크가 사라진 것이다. 존은 몇 달을 꼬박 수소문한 끝에 프랭크의 집을 찾아낸다. 평화로운 중산층 주택가의 평화로운 집이었고 그 집의 구석에는 가면을 벗은 프랭크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서 있었다. 존은 프랭크의 부모님과 대화를 나누게 된다. 부모님은 어느 날 프랭크가 가면무도회 같은 건 없었는데도 학교에서 가면무도회를 한다며 아버지에게 가면을 만들어 달라 했고 그날 이후로 가면을 놓은 적이 없다고 말한다. 존이 프랭크가 그렇게 된 계기를 묻자 부모님은 아무 일도 없었다고 답한다. 그냥 정신병일 뿐이라고. 그러니까 프랭크가 가면을 쓰게 된 이유는 한 마디로 ‘없다’. 가면과 정신병이 프랭크의 음악성과 관련이 있다고 할 수도 없다. 부모님은 고뇌가 음악을 만든 것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그저 화목한 집안이었고 오히려 타고난 음악성으로 인해 프랭크가 활기를 잃어갔다고.


프랭크의 슬픔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먼저 사람들은 흔히 고통을 창작의 밑거름이라고 생각하지만 둘이 필수 불가결한 사이는 아니라는 것이다. 반드시 고통이 있어야만 멋진 창작물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또한 세상에는 억울하게도 뚜렷한 이유도 없이 찾아오는 슬픔도 있다는 것이다. 언젠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바다인 다대포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친구 중 한 명을 오래간만에 만난 날이었다. 눈에 보이는 칼국수집 중 깔끔해 보이는 곳으로 들어갔는데 생각보다도 더 맛있어서 막걸리도 한 잔 했다. 친구가 갑자기 예쁜 편지도 건네줬다. 편지 쓰는 일을 그렇게 힘들어하는 애가 두 장이나 써서 줬다. 칼국수를 다 먹고 나와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서서히 해가 지는 다대포를 걸었다. 깨끗한 하늘, 암청색 바다 위의 윤슬과 동동 떠다니는 오리들이 보기 좋았다. 해수욕장을 가로지르는 나무다리를 걷다가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날따라 별이 참 많았다. 우리는 한참을 올려다보며 아름다움을 만끽했다. 친구와 헤어지고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향하는 길, 갑자기 친구가 준 편지를 어딘가에 버린 후 내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는 오늘 먹은 것을 다 게워내고 싶어졌다. 게워내고 또 게워내고 신물이 나올 때까지 게워내고 싶었다. 여태껏 웃은 모든 웃음이 허무하고 가증스럽게 느껴졌다. 정확한 이유는 없었다. 이런 식의 슬픔도 있는 것이다.


‘홀로 서 있는 보풀 / 꿋꿋이 발을 견뎌내 / 너는 운 좋게 서 있어 / 짓밟히지 않았잖아 / 산들바람 밑에서 떨고 있니?’

일전에 프랭크가 카펫의 튀어나온 보풀을 보고 만든 즉흥곡의 가사다. 어쩌면 프랭크가 저도 모르게 자신을 보풀에 대입한 채 쓴 것일지도 모르겠다. 특히 ‘산들바람 밑에서 떨고 있니’라는 대목이 그러하다. 산들바람은 시원하고 가볍게 부는 바람인데 이 보풀은 강풍도 아니고 산들바람에 떨고 있다고 말한다. 다자이 오사무가 ‘인간실격’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어떤 이는 솜에도 상처를 입는다고. 이 보풀은, 프랭크는, 그런 존재인 것이다. 평화로운 중산층 가정에서 부족한 것 없이 자라왔지만 프랭크는 작은 바람에도 상처를 입는 영혼을 가진 사람일지도 모른다. 프랭크는 남들은 그냥 지나치는 카펫의 보풀에도 눈길을 주고 그것으로 노래를 쓰는 사람이기에 그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꾸준히 나 자신을 의심하는 중이다. 내가 지금 우울증이 맞을까, 어떤 이들은 부러워할 만한 삶을 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뭐가 그렇게 슬플까. 그럴 때면 프랭크를 떠올리려 노력한다. 정확히는 세상에는 이유 없는 슬픔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려 노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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