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무심한 신이시여

영화 ‘짐승의 끝’(조성희,2010)

by 권등대

(영화 리뷰에는 항상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순영은 택시를 타고 허허벌판을 달리고 있다. 그러다 갑자기 야구모자를 쓴 남자가 자신도 같은 방향이라며 막무가내로 택시에 올라탄다. 그러더니 야구모자는 순영과 택시 기사의 과거를 줄줄 읊는다. 또 곧 전기가 나갈 거라면서 숫자를 세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의 말대로 순간 전기가 나가고 모두가 정신을 잃는다. 순영이 정신을 차리자 택시 기사는 메모를 남긴 채 사라진 상태고 택시는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 그때 무전기에서 야구모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는 순영에게 꼼짝 말고 택시에 있으라고 말한다. 그러나 순영은 길을 떠난다. 그렇게 순영의 지난한 여정이 시작된다. 순영이 여정 중에 힘든 일을 겪을 때마다 야구모자는 순영에게 도움을 준다. 이 의뭉스러운 야구모자는 어떤 존재인 것인가. 사람들의 인생을 제 손바닥 보듯 훤히 꿰고 있는 존재, 미래를 예언하고 조언하는 존재, 사람이 고난을 겪을 때면 손을 건네주는 존재. 이 영화에서 야구모자는 신을 은유하는 인물이다.


‘짐승의 끝’은 주인공 순영이 아이를 낳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가는 과정이 담긴 영화로 그 과정은 험난하고 끔찍한 사건들로 가득 차있다. 홀로 남은 아이에게 도움의 손길을 건넸더니 그 아이는 되려 무시와 욕설을 퍼부으며 졸졸 따라다니고 길 위에서 만난 한 여성에게 옷과 신발을 빼앗긴 채 걷다가 발을 다친다. 운 좋게도 한 아저씨가 자전거로 순영을 태우고 자신의 집까지 안내하지만 그 집에서 순영은 성적 유린을 당할 위기까지 처했다가 간신히 빠져나온다. 자꾸 멀리서 짐승인지 괴물인지 모를 것의 숨소리도 들린다. 온갖 고난을 다 겪다가 순영이 정말 벼랑 끝까지 내몰릴 때면 기적적으로 야구모자가 순영을 찾아와 손을 내민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다. 그는 진정한 구원을 이루어주지는 않는다. 야구모자는 말한다. “난 진심으로 네가 무사했으면 좋겠어. 왜냐면 나는 너를 너무 사랑하니까. 그렇다고 내가 어항 속에 손을 넣어서까지 챙겨주진 않아. 생전 그런 적이 없어.” 그는 곤경에 빠진 사람이 진심으로 무사했으면 하나 자신의 손에 물을 묻혀가면서까지 그를 구해주지는 않는다. 그저 어항에 빠진 이에게 손만 살짝 내밀어 줄 뿐이며 그이가 어푸어푸 숨이 넘어가는 모습 보며 사랑한다고 이야기할 뿐이다.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 마는 네가 아무리 못생기고 아버지 없이 자라서 막 돼먹고 잘하는 것도 별로 없고 몸에서 막 이렇게 냄새나고 돈도 없이 풍걸린 엄마 똥오줌 받느라고 그 나이 먹도록 연애도 한 번 못해보고. (…) 근데 뭐, 그런 깔아주는 애들도 필요하니까. 너도 나름 필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렴.​ (…) 사랑해. 내가 도와줄게.”

야구모자는 순영에게 끔찍한 일을 저지른 자전거 아저씨마저 안아주며 사랑한다고 말한다. 누구를 위한 것인지 모를 박애주의다. 그리고 최악의 위로를 건넨다. 이 세상에는 너처럼 ‘깔아주는 애’도 필요한 법이라고. 그러니까 야구모자가 이들의 고통을 그저 안타까워만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다. 그렇게 태어난 것은, 그런 삶을 살게 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그는 인간이 위아래로 나뉘는 것을 순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야구모자의 무자비함은 순영의 아이가 사실은 야구모자의 아이라는 서사에서 드러난다. 야구모자는 식당에서 밥을 먹으면서 사람들을 둘러본다. 그리고는 수첩을 꺼내 식당 안의 사람마다 번호를 매겨 사다리 타기를 시작한다. 사다리 타기의 결과로 선택된 번호에 해당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순영이었다. 그날 밤, 야구모자가 순영의 집을 찾아간다. 놀란 순영에게 야구모자가 부드럽게 말을 건다. “가,라고 한 마디만 말하면 나는 갈 거야. 갈까? … 나 어때?” 그의 말에는 어떤 불가항력이 있었고 순영은 그를 거부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둘은 밤을 보내게 된 것이고 순영은 이로 인해 아이를 갖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무거운 몸으로 여정을 떠나게 된 것이다. 즉 애초에 순영의 고난은 그에 의해 시작된 것이다. 여정의 마지막 순간, 순영은 말할 수 없는 몰골로 길에서 아이를 낳게 된다. 그리고 야구모자는 그 아이를 안고 멀어진다. 고난의 대상을 사다리 타기 따위로 가볍게 고르는 무심함, 거부할 수 없는 힘으로 불행을 내리꽂는 잔인함, 막상 최악의 상황에서는 뒷모습만을 비추는 무책임함을 갖춘 이의 이름은 이 영화 속에서 ‘신’이다.


참 기형적인 세상이야, 라며 혀를 쯧쯧 차고 돌아서기에는 너무도 기형적인 세상이다. 다른 많은 이유가 존재하지만 이러한 이유로 나는 독실한 무신론자가 된 것도 있다. 이렇게 슬픈 세상에 신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라면 신이 한참 무능하고 원망스럽게 느껴질 것 같아 차라리 신은 없다고 믿는 편이다. 그러니 독실한 무신론자인 내가 가끔 이 세상에 신이라는 존재가 정말 있다면 어떤 모습일까, 를 상상할 때면 이 영화 속의 신을 떠올리는 것이다. 살려고 바글바글 대는 어항 속 물고기들을 지켜보며 눈물을 흘리며 사랑한다는 말 외에는 딱히 해주는 것이 없는 존재, 이 모든 모순을 순리라 생각하는 존재, 그리하여 무심하고 무자비한 존재. 무신론자의 편파적인 생각인가 싶다가도 하루도 끊이지 않는 뉴스들에 눈물을 흘리다 보면 생각은 다시 되돌아간다. 이토록 무심한 신이시여, 차라리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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