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권력

영화 ‘아네트’(레오 까락스)와 ‘데몰리션’(장 마크 발레)

by 권등대

(영화 리뷰에는 항상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내가 그녀를 만나는 이유는 명확한데 그녀가 나를 만나는 이유는 잘 모르겠어.”


언젠가 연애를 하고 있었을 때 친구는 연인과 나 중에 누가 더 우위에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되물었다. 그런 게 있느냐고. 친구는 다시 물었다. 누가 사랑한다는 말을 더 자주 하느냐고. 내 연인이 더 자주 하는 것 같다고 답하자 그럼 내가 더 우위에 있는 거라고 친구는 말했다. 그 당시의 나는 그 말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사랑이란 수평적인 감정이라고 생각했던 나는 사랑하는 사이에서 한 명이 더 우위에 있는 것이 가능한지, 그리고 그것이 정상적인 것인지에 대해 의문이 들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이에서도 권력이 존재한다는 것을 나는 이후에 깨닫게 되었다.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지는 것이라는 흔한 말도 결국 사랑 내부에서의 권력의 작동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또한 경제적으로 혹은 사회 지위적으로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 사랑이라는 관계에서 더 우위를 차지하는 경우가 많은 것도 흔한 일이다.


영화 ‘아네트’의 주인공 헨리의 독백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헨리가 이 사랑의 관계 속에서 자존감이 낮다는 것이다. 헨리의 연인 안은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유능한 배우로서의 지위를 지닌 사람이다. 헨리 역시 잘 나가는 코미디언이지만 같은 유명세를 가지고 있다고 쳤을 때 코미디언보다는 배우가 좀 더 우아한 지위를 지니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여기서 일차적 권력이 형성된다. 또한 이 독백을 통해 헨리가 안을 더 사랑한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헨리는 자신이 안을 사랑하는 이유는 명확하지만 안이 자신을 사랑하는 이유는 모호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사실 안은 헨리를 사랑하는 이유가 명확할 수도 있다. 안이 헨리에 비해 눈에 띄게 애정표현을 덜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헨리가 안이 자신을 사랑하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하는 이유는 헨리가 안을 사랑하는 만큼 안이 헨리를 사랑하지 않음을 헨리가 느껴서, 혹은 헨리 스스로 자존감이 낮아 안의 사랑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해서일 것이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여기서 이차적 권력이 형성된다. 정리를 해보자면 안은 헨리보다 사회 지위적으로 우위를 차지하고 있고 헨리를 향한 안의 사랑은 안을 향한 헨리의 사랑에 비해 양이 적(다고 헨리는 느낀)다. 그리하여 이 사랑의 권력은 안에게 확실히 기울어져 있다.


이로 인해 헨리는 열등감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을 것인데 그 감정이 폭발하게 되는 계기가 헨리의 코미디 쇼의 몰락일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높은 지위를 얻는 안과 달리 헨리는 날로 초라해져만 간다. 그러한 자신을 보며 헨리의 자존감은 바닥을 치게 되어 급기야 안을 시기 질투하기에 이르렀고 그리하여 제 손으로 안을 죽이게 된다. 헨리는 사랑 내부의 권력을 파괴적인 방법으로 뒤엎어 버렸다. 사랑하는 사이에서마저도 권력이 작동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슬픈 일이다. 하지만 그 권력을 진짜 권력이라고 착각하고 손에 쥐려고 드는 순간 슬픈 일을 넘어 이처럼 끔찍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사랑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나 헨리는 그러지 못했다.


이에 반해 영화 ‘데몰리션’에서는 사랑 내부의 권력관계가 아름답게 전복된다. 주인공 데이비스는 무감하다. 데이비스의 삶은 무탈하고 평탄하고 반복적이다. 줄리아와의 연애도, 결혼 생활도 그러했다. 사랑해서 연애하고 결혼했다기보다는 쉬워서 그랬다고 한다. 줄리아는 착했고 그래서 쉬웠다. 그리고 데이비스는 알게 모르게 이러한 둘의 관계에서 묘한 우월감을 느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평탄함은 거기서 오는 것일 수도 있다. 줄리아가 몇 번이고 부탁한 냉장고 수리를 데이비스는 몇 번이고 까먹는다. 제대로 듣지 않은 것이다. 줄리아는 그런 데이비스에게 화도 내지 않는다. 익숙하다는 듯이 푸시시 웃을 뿐이다. 그러나 그녀의 웃음은 얼마 가지 못했다. 트럭이 차를 덮쳤고 데이비스만 살아남았다. 데이비스는 줄리아가 부탁했던 냉장고 수리를 시작한다. ‘뭔가를 고치라면 전부 분해한 다음 중요한 게 뭔지 알아 내야 돼’라는 장인의 말에 따라 그는 냉장고를 시작으로 컴퓨터, 아내가 주문했던 커피머신 등을 미친 듯이 분해한다. 사실 분해가 아니라 파괴에 가깝다. 그리고 결국에는 줄리아와의 추억이 잔뜩 묻어 있는 집을 때려 부수기 시작한다. 데이비스는 온갖 연장과 기계를 동원하여 이틀을 꼬박 집을(자신을) 부수지만 정작 데이비스를 와르르 무너뜨린 것은 줄리아가 남긴 가벼운 포스트잇 한 장이었다. 그 포스트잇을 화룡정점으로 하여 데이비스는 완전히 분해되었고 드디어 자기 자신을 알게 되었다.


그가 뒤늦게 알게 된 진실은 이것이다. 데이비스는 줄리아를 사랑했고 사랑한다. 그러나 여태껏 그 사랑에 무심했다. 즉 자신의 감정에 무심했던 것이다. 자연스레 그의 옆에 자리하는 줄리아의 환영만큼, 자판기 회사에 써댄 항의 편지만큼, 일상 곳곳에 남은 그녀의 흔적만큼, 물건들을 파괴하던 힘만큼, 그의 공허한 표정만큼, 그녀의 유산을 재단 설립에 쓴다는 서류에 동의 서명을 망설인 시간만큼 데이비스는 줄리아를 사랑했다. 줄리아가 살아 있을 때는 둘 사이의 권력관계가 너무도 명확하게 데이비스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으나 이제 그 권력은 줄리아 쪽으로 기울게 된다. 데이비스가 ‘Everything is a metaphor’라고 말하던 장면에서 이를 확실히 느꼈다. 밀란 쿤데라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사랑은 메타포로 시작된다고 말한 바 있지 않은가. 데이비스는 줄리아에 대한 사랑을 확인함으로써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진다. 드디어 눈물이 터지기 시작한다.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던 권력의 시소 한 편에 앉아 있는 줄리아에게 폭우와도 같은 데이비스의 눈물이 쏟아진다. 폭우의 세기에 줄리아의 자리가 되려 내려앉는다. 그의 깨달음이 슬픈 것은 이제 더 이상 그녀가 옆에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깨달음은 아름답다. 이제 앞으로 데이비스는 사랑 내부의 권력을 최소화하려 노력하는 사람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사랑이 슬퍼지지 않기 위해서는 이러한 자세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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