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의 글에 대한 애정 어린 엉터리 기록
이상의 수필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가 본다. 내가 가장 인상 깊게 기억하고 있는 수필은 ‘행복’이라는 수필이다. ‘행복’은 손바닥만 한 크기의 종이로 약 세 바닥밖에 되지 않는 아주 짧은, 소설과 비슷한 형태의 수필이다. 내가 이 수필을 잊지 못하는 이유는 아주 개인적이다. 한창 공시 공부를 할 때였다. 언젠가부터 불안이 찾아왔다. 아무 이유 없이 심장이 뛰었고 손금을 타고 땀이 흘렀다. 시야가 떨렸다. 그때 대처법으로 삼은 것이 이상의 ‘행복’을 집어 들고 소리 내어 읽는 것이었다. 신기하게도 읽다 보면 불안이 가라앉아 있었다. 그 당시에는 짧다는 이유로 줄줄 읽은 것이었지만 이제와 생각해보건대 아마 이 작품에 나를 이끈 어떤 슬픔이 있었던 탓도 큰 몫을 하였던 것이다.
‘행복의 절정을 그냥 육안으로 넘긴다는 것이 내게는 공포였다.’
화자는 연인 ‘선’과 함께 바닷물로 뛰어내리고자 한다. 화자가 세상을 등지려는 이유는 무엇인가. ‘행복의 절정을 그냥 육안으로 넘긴다는 것’이 공포스럽기 때문이라고 화자는 말한다. 살다가 행복한 순간을 마주할 때 대부분은 그 순간을 만끽하겠지만 그러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행복한 순간을 마주하면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지둥 댄다. 그러다 보면 그 순간은 지나가고 난 뒤다. 행복이 어색한 사람들은 그러하다. 찾아온 행복을 행복해하지 못하고 그저 멀뚱히 바라만 보다가 끝나는 일이 반복된다. 그리하여 자신은 평생 행복이라는 감정을 느끼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른다. 이에 화자는 공포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에 마음 깊이 공감했다.
‘너는 네 평생을 두고 내 형상 없는 형벌 속에서 불행하리라 해서 우리 둘은 결혼하였던 것이다. 규방에서 나는 신부에게, 행형(行刑)하였다.’
화자는 결국 연인 ‘선’과 바다로 뛰어내리고 숨이 끊어지려던 찰나 ‘선’의 입에서 화자의 이름이 아닌 다른 남자의 이름이 튀어나오는 것을 듣는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화자는 가까스로 살아남은 ‘선’을 건져내고 이후 둘은 결혼한다. 그러나 이 결혼의 다른 이름은 ‘형벌’이고 ‘행형’이다. 화자는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선’을 결혼으로 꽁꽁 묶어두는 것이다. 상대를 사랑하는 일이 그 상대에게 ‘형벌’이 되는 경우도 있다는 사실이 비참하다. ‘사랑’과 ‘형벌’이라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가 어우러질 때도 있다는 사실이 슬프다. 내가 경험 해 본 적 없는 슬픔이었으나 충분히 비참했다. 이 글이 소설이 아니라 수필이라는 점에서 더욱. 소설 같은 이야기, 영화 같은 이야기 같은 건 사실 없다는 것을, 삶이 곧 소설이고 영화라는 것을, 그러므로 소설과 영화 속에서나 겪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슬픔들은 당연히 삶에도 존재한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이 글의 슬픔에 마음이 동해 하도 많이 읽는 바람에 그 당시에는 앞부분을 거의 다 외울 지경이었다. 이상의 ‘행복’은 그 당시 나에게 있어 주기도문과 다름없는 것이었다.
내가 부족한 시간이나마 이상을 읽으면서 느낀 것은 이상은 고통을 낭만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끔 고통을 쇼윈도에 올릴 물건처럼 여기고 쓴 듯한 글을 만나곤 한다. 고통마저 상품화하는 것이다. 나는 이만큼 아팠으니 옳거니, 이걸로 글을 써야지, 하는 듯한 글을 읽으면 불편하다. 그에 반해 이상은 고통을 고통으로만 표현했지 그것을 낭만화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의 첫 소설이자 유일한 장편소설인 ‘십이월 십이 일’의 연재 도중 밝힌 작가의 의도가 그에 대한 하나의 증거이다.
‘나의 지난날의 일은 말갛게 잊어 주어야 하겠다. 나조차도 그것을 잊으려 하는 것이니 자살은 몇 번이나 나를 찾아왔다.
(…) 모든 것이 다 하나도 무섭지 아니한 것이 없다.
(…) 나는 죽지 못하는 실망과 살지 못하는 복수, 이 속에서 호흡을 계속할 것이다. 나는 지금 희망한다. 그것은 살겠다는 희망도 죽겠다는 희망도 아무것도 아니다. 다만 이 무서운 기록을 다 써서 마치기 전에는 나의 그 최후에 내가 차지할 행운은 찾아와 주지 말았으면 하는 것이다. 무서운 기록이다. 펜은 나의 최후의 칼이다.’
트라우마라는 것이 있다. 트라우마가 무서운 것은 트라우마에 관한 한 우리는 주체가 아니라 대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즉 ‘나는 트라우마를…’이라는 문장은 성립될 수 없고 ‘트라우마는 나를…’이라고 겨우 쓸 수 있을 뿐이라고 한다. 이상의 문장을 보자. ‘내가 자살을 하려고 했다’라고 쓰지 않고 ‘자살이 나를 찾아왔다’라고 썼다. 트라우마의 본질에 대해 아는 사람은 이 문장이 기교가 아니라 절절한 고통임을 알아볼 것이다. 또한 그는 자신이 ‘죽지 못하는 실망’과 ‘살지 못하는 복수’ 사이에 있다고 말한다. 죽지 못해 산다는 표현보다 죽지 못하는 실망 속에 있다는 표현이 더 와닿는 이유는 ‘실망’이라는 단어에 있을 것이다. 자신이 죽지 못한다는 사실에 실망까지 한다는 것은 그만큼 열렬히 죽음을 원한다는 증거일 것이다. 이상은 여전히 직접적인 표현 없이 직접적인 고통을 전달한다. 이상이 그 고통 속에서 유일하게 붙잡고 있었던 것이 펜이다. 그 펜 끝에서 나온 걸은 날것의 고통임이 분명하다. 맛 좋고 향 좋게 가공된 고통이 아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