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은 자라지 못한 채

영화 ‘파수꾼’(윤성현, 2010)

by 권등대

(영화 리뷰에는 항상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는 주인공 기태의 죽음으로 시작된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기태의 죽음이 가장 친한 친구였던 희준, 동윤과의 관계의 어긋남에 크게 기인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먼저 기태와 희준의 이야기다. 쉬는 시간, 친구들이 다 같이 가족 이야기를 하는데 아버지와 둘이서 사는 기태는 가족 이야기를 달가워하지 않아 괜히 대화 주제를 바꾼다. 희준과 옆에 있던 친구는 그런 기태의 모습에 눈짓을 주고받는다. 희준은 사실 기태가 매번 가족 관련 이야기를 피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희준은 소위 학교 ‘짱’의 위치에 있는 기태와의 관계에서 묘하게 아래를 담당하는 느낌을 받는 아이였기에, 그리고 자신이 좋아하는 여고생이 기태를 좋아한다는 사실에 살짝 토라졌기 때문에 약간은 쌤통이다, 라는 마음으로 저지른 작은 일이다. 그러나 그들의 눈짓에 기태는 크게 상처를 받는다. 그래서 기태는 괜히 희준에게 당연하다는 듯 담배 망을 보라고 명령하는 등 희준이 미묘한 ‘계급’의 차이를 더욱 느끼게끔 유도한다. 기태에게서 버려지는 것이 두려워 그런 행동들을 묵인해왔던 희준은 점점 자신의 화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기태는 희준이 자신의 사과를 받아주지 않자 화가 나 결국 희준을 폭행하기에 이른다. 둘의 관계는 어긋날 대로 어긋나 버리고 어느 날 희준은 기태가 받아들이기에 충격적인 말을 전하고 전학을 가게 된다.


“쟤네도 너 친구로 생각해서 네 옆에 있는 거 아니야, 착각하지 마. 너랑 학교 다니면 편하니까, 뭐 좀 된 것 같으니까 네 옆에 있는 거야. 나도 너 친구로 생각한 적 한 번도 없고.”

(희준의 대사 中)

다음은 기태와 동윤의 이야기다. 희준이 전학을 간 후 기태는 갑자기 동윤에게 동윤의 여자 친구 세정에 대한 안 좋은 소문에 대해 이야기하며 진지하게 만나지 말라고 충고한다. 이후 세정은 자신을 둘러싼 소문으로 인해 극단적 시도를 한 것으로 보인다. 기태는 희준이 떠난 후 자신을 진정한 친구라고 생각해주는 사람은 동윤뿐이라는 생각에 관심을 받기 위해 벌인 일일 것이다. 물론 기태가 소문을 퍼트린 것은 아니지만 이 일이 기태와 관련이 없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에 동윤과 기태가 갈등을 빚다가 기태는 희준에게 그랬던 것처럼 다른 아이들과 함께 동윤을 폭행한다. 기태는 이후 크게 부상을 입은 동윤을 찾아가 사과하며 너만은 나를 떠나지 말라 애원한다. 그러나 그런 기태에게 돌아온 동윤의 말은 잔인하기만 하다.


“내가 네 진정한 친구다,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다, 지껄일 때 속으로 얼마나 비웃었는지 알아? 단 한 번이라도 내가 네 진정한 친구였단 생각하지 마라. 생각만 해도 역겨우니까. (…) 아니, 처음부터 잘못된 거 없어. 처음부터 너만 없었으면 돼.” (동윤의 대사 中)


기태는 이렇듯 모두에게 자신을 부정당했고 그리하여 무너졌던 것이다. 무뚝뚝한 아버지와 살아왔던 만큼 표현이 서툴고 따뜻한 관심은 많이 받아본 적이 없었을 기태는 친구들에게서 자신의 존재를 찾고 관심에 대한 욕구를 만족시켰다. 친구들 사이에서 자신이 항상 중심이길 바랐다.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은근히 우위에 있으면서 주변 친구들이 자신을 알아주는 느낌에 만족했다. 하지만 사실 기태는 친구들의 작은 눈빛에도 상처를 받는 아이이며, 친구들에게서 버려지기 싫다는 불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소통과 표현에 미숙했던 기태는 연약한 자신을 지키기 위해 되려 공격적인 방식으로, 화와 폭력으로 소통했다. 이러한 기태의 소통방식은 친구들에게 상처와 오해로 다가갔고, 그로 인해 친구들은 기태를 떠나게 되었다. 결국 기태는 자신을 지키려다 친구들을 지키지 못했고, 곧 자신도 지키지 못하게 된 것이다. 영화의 제목(파수꾼-경계하여 지키는 일을 하는 사람)과 상당히 역설적인 부분이다.


작은 눈빛에도 예민하게 반응했던 그때의 이야기에 공감하지 못할 이는 없을 것이다. 영화 속의 누구도 쉽게 욕할 수가 없을 것이다. 나 역시 영화 속 소년들만큼 불안했고, 표현이 서툴렀고, 너무 쉽게 상처를 주고받았으며 관심을 갈구했다. 친구와의 관계가 그렇게도 중요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렇게 친구 관계에 매달렸던 궁극적인 이유는 결국은 나를 위해서였던 것 같다. 네가 없으면 내가 혼자이니까, 아무것도 아닌 것 같으니까. 그때는 나의 정체성을 나 자신에서 찾기보다는 관계 속에서 찾곤 했던 것이다. 또한 무엇이 상처를 주고받게 했는지 찬찬히 들여다 보고 한 번만이라도 제대로 털어놓는 일이 무엇보다 필요했으나 제대로 들여다볼 여유가 없었다. 불안은 여유를 삼키는 법이다.


이들의 이야기에 이토록 공명하게 되는 이유가 내 학창 시절이 너무도 겹쳐 보여서 뿐만은 아니다. 그들은 자라지 못하고 그대로일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래서 희준과 동윤, 기태(살아 있었더라면)는 성장하였을까? 달라진 것이 있었을까? 이 이야기는 그놈의 ‘성장 스토리’가 아니라는 점이 가장 큰 매력이자 고통이다. 그들은 졸업을 하고 성인이 되어서도 그대로일 것이다. 같은 아픔을 또다시 반복할 것이다. 이렇게 단언하는 이유는 우리 대부분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단지 어려서 제 상처를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한 것이 아니다. 다 큰 어른도 똑같다. 누구나 자신의 상처에 관해서는 여전히 자라지 못한 채인 경우가 많다. 곁눈질과 당황스러운 목 넘김 소리, 불안한 발걸음과 완전히 작별하고 성장한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아픈 성장통을 겪고도 성장하지 못한 어른들이 수두룩하다. 나 역시 그들 중 한 명이라는 점을 새삼스레 깨닫게 되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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